5) 집착을 떠나서 별도의 아트만(자아)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 성립하지 않는다면 아트만은 집착하는 것이 있다고 하는 것이 된다. 그렇다면 그대의 견해대로 다시 아트만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 된다.
*몸을 떠나서 자아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런 일은 이미 성립했었다. 만일 몸이 곧 아트만이라면 그대에게는 그러한 아트만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離身無有我 是事爲已成 若謂身卽我 若都無有我)
6) 또한 집착하는 몸이 바로 아트만은 아니다. 그 집착하는 것은 소멸하고 또한 흥기(興起)한다. 실로 집착의 근본이 집착해서 취하는 주체가 있다고 하는 것이 도대체 어떻게 있을 수 있는가.
*몸은 결코 자아가 아니다. 몸의 相은 生滅하기 때문이다. 어떻게 取로써 取하는 者를 짓겠느냐(但身不爲我 身相生滅故 云何當以受 而作於受者)
7) 또한 집착의 근본과 다른 집착의 주체(아트만)가 존재한다면 결코 성립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만일 양자가 다르다면 집착하는 것도 아닌 것이 주체가 되는 것이 인식될 것이다. 그러나 (그와 같은 것은) 인식되지 않기 때문이다.
*만일 몸을 떠나서 자아가 존재한다면 이런 일은 있을 수 없다. 감수작용이 없이 자아가 존재한다는 것으로, 실제로 그런 것은 이루어질 수 없다.(若離身有我 是事則不然 無受而有我 而實不可得)
8) 이와 같이 그 아트만(자아)은 집착하는 근본과 다른 것도 아니고 바로 집착도 아니며, 취가 없는 자아는 존재하지 않으며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라는 이와 같이 보는 것이 결정적인 지식이다.
*지금의 아트만은 집착을 떠난 것이 아니다. 또한 그것이 바로 아트만인 것도 아니다. 집착이 없는 것도, 없지 않은 것도 아니다. 이것이 바로 결정적인 이치이다.(今我不離受 亦不卽是我 非無受非無 此卽決定義)
**나라고 할 만한 것과 세상의 존재들은 오온과 십이입과 십팔계라고 할 수 있고 이런 모든 법들은 다 인연으로 생겨서 자성이 없으므로 그 법 가운데 서 나[아我]를 구하여도 얻을 수가 없다. 오온중의 수·상·행·식을 마음이라 하는데 이러한 마음은 육근이 육경을 상대하여 감수생각하고, 정신작용을 일으키고, 인식 판단하므로 중생들은 대상에 집착하여 탐·진·치 등 번뇌를 일으킨다. 그런데 이렇게 집착하는 마음을 생각해 보면, 이 집착하는 마음이 이전의 마음에서 생겨난 것인가. 생겨나지 않았는가. 이전의 마음으로부터 생겨났다면 이전의 마음과 지금의 집착하는 새로 생겨난 마음의 둘이 된다. 또한 이전의 마음으로부터 생겨나지 않았다면 지금의 집착하는 마음은 어떻게 있었겠는가. 이렇게 관해보면 집착하는 마음이 원래 자성이 있어서 스스로 생겨난 것도 아님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집착하는 마음이 없는데 어찌 집착하는 대상이 있겠는가. 이와 같이 관할 때 대상과 집착하는 마음이 함께 없어지고 마음의 지혜가 개발된다.(월창거나 {선학입문})
***유위법을 관찰해 보면 육근이 육경을 상대로 미혹하여 탐·진·치 번뇌를 일으키고, 견혹·사혹의 삼계의 번뇌가 된다. 이 번뇌들은 심신을 번거롭게 하여 신구의 삼업을 야기하고 신·구·의 삼업으로 십선·십악·오계·오역을 저지르니 그 과보로 선·악의 과보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이를 중생들의 혹(惑)·업(業)·고(苦)라 한다. 이와 같이 중생들은 육근이 육경에 상대하여 집착하여 모두 괴로운 모습이니 중생들이 이렇게 괴로운 것은 자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자재하지 못하므로 자성이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법 가운데서 나의 자성을 구하여도 얻을 수 없다. 그렇다면 이러한 법들을 떠나서 나를 구할 수 있는가. 이러한 법들을 떠나서도 나를 구하면 더욱 나를 구할 수 없으므로 일체의 모든 소견과 집착을 버려야 한다(월창거나 {선학입문}).
9) “과거세에 나[自我]는 존재하지 않았다.”라는 것, 그것은 성립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전의 생애들(=前生들)과 다른 이것(今生)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과거의 나는 있지 않았다는 이런 일은 옳지 못하다. 過去世에서의 내가 지금과 다르다는 것도 역시 옳지 못하다.(過去我不作 是事則不然 過去世中我 異今亦不然)
10) 만일 이것(금생의 나)이 그것(전세의 나)과 다르다고 한다면 그것(전생의 나)을 배제하여도 (이것, 즉 금생의 나는) 존재하게 되리라. 바로 그와 같이 그것(전생의 나)이 같은 상태로 존속存續하는 것이 될 것이다. 혹은 거기서 죽지도 않은 것이 태어나게 되리라.
*만일 다르다면 그것 없이도 응당 지금이 존재해야 한다. 내가 과거세에 머물러 있지만 지금의 나는 스스로 생한 꼴이 된다.(若謂有異者 離彼應有今 我住過去世 而今我自生)
11) 개인존재의 단멸斷滅이나, 업業이 과보를 실현시키는 것들이 소멸시키기도 하고, 그래서 별도의 다른 사람에 의해 지어진 업業들이 다른 사람들이 누리게 되는 결점이 부수해서 일어나게 된다.
*이와 같다면 (개인존재가) 단멸하고, 업과 그 과보가 소실된다. 저 사람이 (업을) 짓고 이 사람이 (업을) 받는, 이와 같은 등의 과실이 있게 된다.(如是則斷滅 失於業果報 彼作而此受 有如是等過)
12) (아트만)이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는데 지금 발생하는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여기서는 (다음과 같은) 과실過失이 부수해서 일어나게 되기 때문이다. 자아가 (새롭게) 만들어진 것으로 되든가 혹은 원인 없이 발생하는 것이 되리라.
*먼저는 없었는데 지금은 존재한다는 이 말에도 과실이 있다. 자아가 지어진 존재가 되기도 하고 원인 없이 존재하는 것이 되기도 한다. 자아가 (새롭게) 만들어진 것으로 되든가 혹은 원인 없이 발생하는 것이 되리라.(先無而今有 此中亦有過 我則是作法 亦爲是無因)
13) 이와 같이 과거세에 “나는 존재하지 않았다”, “나는 존재했다”, “나는 존재하지 않기도 존재하기도 한 그 양자兩者이다”, “그 양자兩者도 아니다”라는 견해, 이것은 성립하지 않는다.
*그처럼 과거세에 내가 있었다, 없었다, 있으면서 없었다,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았다는 견해, 이것은 모두 옳지 못하다.(如過去世中 有我無我見 若共若不共 是事皆不然)
무엇을 일체법이 공함을 관하는 것이라고 하는가?
**나를 관하는 법: 수행자는 현재의 일념은 망심이 접촉하는 대상을 따라 일어남을 잘 관찰하여, 이와 같은 마음은 마음을 원인으로 하므로 생긴 마음인가. 마음을 원인으로 하지 않으므로 생긴 마음인가. 마음을 원인으로 하기도 하고 마음을 원인으로 하지 않기도 하므로 마음인가. 마음을 원인으로 하는 것도 아니고 마음을 원인으로 하지 않는 것도 아니므로 생긴 마음인가. 삼세에 있는가. 안 밖 양 중간에 있는가. 어떠한 자취가 있으며, 어떤 곳에 있는가.
이와 같은 등의 여러 가지 인연 중에서는 결코 마음을 구할 수 없다. 마음은 꿈과 같고 환상과 같이 진실 되지 못하며 적연하기가 허공과 같아서 이름도 모습도 없으니 분별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 때 수행자는 오히려 마음이 곧 생사임을 보지 못하는데 어찌 마음이 열반임을 볼 수 있겠는가. 이미 관할 대상도 없고 관하는 주체 또한 없으니 취하지도 버리지도 의지하지도 집착하지도 않는다. 일체의 생각도 일어나지 않아 마음이 항상 적연하고 적연한 데에도 또한 주하지 않으니 언어의 길이 끊어져 말로 표현할 수가 없는 것이다.(천태대사, {법화삼매참의})
***일체망상 전도로 지어진 죄와 복, 즉 제법은 모두 마음에서 일어나고 마음을 떠나서는 죄와 복 그리고 일체 법도 없기 때문이다. 만약 마음과 무심을 관하면 죄 복에 주함이 없고 죄 복의 성품이 공함을 알면 곧 일체법이 모두 공하다.
14) “미래 세상에서 우리는 존재할까.”라든가 “미래 세상에서 우리가 존재하지 않을까.” 라고 하는 견해는 모두 과거세의 경우와 동일하다.
*내가 미래세에 존재할까. 존재하지 않을까. 이와 같이 보는 것은 모두 過去世의 경우와 동일하다.(我於未來世 爲作爲不作 如是之見者 皆同過去世)
15) 만일 신神이 있다고 할 때 그 신이 그대로 인간이 된다면 그와 같은 것은 常住하는 것이 된다(그것에 집착하는 것이다). 또 천신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리라. 왜냐하면 常住하는 것은 태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만일 (전생에 천신이었다가 죽어서 현생에 인간으로 태어난 경우) 天神이 바로 지금의 인간이라면 상견常見이라는 극단론에 빠진다. 천신은 곧 생生함이 없(이도 존재하)는 것이 된다. 상주常住하는 존재는 생生하지 않(고도 존재하)기 때문이다.(若天卽是人 則墮於常邊 天則爲無生 常法不生故)
**과거세의 내가 존재했다면 과거세의 내가 어떻게 현재세의 내가 될 수 있겠는가의 문제가 생긴다. 가령 내가 십악을 저질러 축생이거나 선업을 지어 천신이었다면 전세의 자아가 현세의 자아가 되는 것이 된다. 그렇다면 전세에 축생이거나 전세의 천인이 그대로 현세의 인간이 되는 셈이다. 그러면 과거의 나가 현재의 나로 상주하는 것이 된다(상주의 과실). 반대의 경우, 전세의 천신이나 축생이 현세의 나가 되지 못한다면 과거도 무상하므로 현재의 나라는 것도 있을 수 없다(단멸의 과실). 결국 나는 집착을 떠난 것도 아니고 집착 자체도 아니고 집착이 없는 것도 아니고 없지 않은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과거세에 내가 있었다는 것은 옳지 못하다.
16) 만일 인간이 천신天神과 다름이 있다고 한다면, 그렇다면 (이와 같은 견해는) 상주常住하지 않는 것(무상에 집착하는 것)이 되리라. 만일 인간이 천신과 다르다면 개체로서 연속連續이 성립되지 않는다.
*만일 천신이 인간과 다르다면 그것은 인간이 무상하다는 것이다. 만일 천신이 인간과 다른 존재라면 (인간은) 상속도 존재하지 않는다.(若天異於人 是卽爲無常 若天異人者 是則無相續)
17) 만일 (연속하는 개인의 존재가) 일부분은 천신天神에 속하고 일부분은 인간적인 것에 속한다면 무상하게 있기도 하고 상주로 있기도 한 것이 되리라. 그러나 이와 같은 것은 이치에 합당하지 않다.
*만일 반半은 천신天神의 경우이고 반은 인간이라면 두 가지 극단[二邊]에 빠진다. 즉 상주常住와 무상無常이다. 이런 일은 옳지 않다.(若半天半人 則墮御二邊 常及於無常 是事則不然)
18) 만일 무상과 상주常住의 양자兩者가 함께 성립한다면 상주도 아니고 무상도 아닌 것이 되어, 자기 바라는 대로 성립하려고 할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常住와 無常의 양자가 함께 성립한다면 상주도 아니고 무상도 아닌 것 역시 성립해야 한다.(若常及無常 是二俱成者 如是則應成 非常非無常)
19) 만약 어떤 사람이 어디에서 와서 또한 그 어딘가에서 어디엔가로 가는 것이라면, 그렇기 때문에 윤회는 시작됨이 없는 셈이 되리라. 그러나 그와 같은 일은 존재하지 않는다.
*어떤 존재가 만일 오는 것이 확실히 존재하고 가는 것이 확실히 존재한다면 생사生死는 시작이 없는 것이 되겠지만 실제로 그런 일은 없다.(法若定有來 及定有去者 生死則無始 而實無此事)
20) 만일 첫째 그 무엇인가가 상주하는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둘째 그 무엇인가가 무상한 것이 존재하는가. 혹은 셋째 그 무엇인가가 상주하기도 무상하기도 한 것이 존재하는 것인가. 또한 넷째 양자를 떠나서(상주하지도 않고 무상하지도 않는) 그 무엇인가가 존재하는가.
*지금 만일 상주하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무상한 것이 있고 또한 상주하기도 하고 또한 무상하기도 하며, 또한 상주하지도 않고 무상하지도 않은 것이 존재하겠는가.(今若無有常 云何有無常 亦常亦無常 非常非無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