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성중에 남쪽 성을 장준이 지었다고 하는 것은 확실해 보인다. 여광군에 의해 고창군에
이르고(319년) 다시 언기, 구자에 원정군이 다다랐다(335). 동투르키스탄 제국의 교역을 통해서 얻은 이익으로 장준은 훌륭한 성을 지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 사치스런 생활 모습은 그의 묘가 도굴되었다고 전하는 기록에서도 그 사실을 엿볼 수 있다. 『진서』 여광전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들이 보인다.
곧 서호(序胡)의 안거(安㨿)는 장준 묘를 도굴했다. 장준의 모습은 생시와 같이 보였다.
진주로 된 상자, 유리로 된 통, 백옥의 술통, 적옥의 퉁소, 자옥의 피리, 산호장식의 끈,
마노로 된 추(錘), 수륙(水陸)의 진기한 물건들이 드러나게 되었다.
그래서 고장성은 전량 제1대의 장궤가 305년에 이미 흉노들이 지었던 개장성을 기초로 하여
개축했던 것을 시작으로 제 4대의 장준이 중성, 동성, 남성, 서성, 북성의 장대한 많은 성을
지었던 것이다. 이전의 양주 자사 양희(梁熙)도 376년에 이르러 이 성에 머물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래서 385년 9월 여광이 여기에 입성해서 후량을 건립하게 되었다. 여광을 따라서 온
라집도 이 성에 머물게 되었다. 이후 16년간 머물면서 라집은 여광의 정치 군사의 고문을 했다.
10. 후량 건국사정과 라집
여광이 고장에 입성했던 것은 385년 9월경이었는데 이때 바로 량(후량)을 건국했던 것은
아니었다. 383년 전진왕 부견은 80만의 군대를 이끌고 강남 정벌에 나섰다. 이때 동진은
효무제와 비수(肥水)에서 전쟁을 벌려 전진이 대패했다. 이로 인해 전진에 복속되어 있던
선비족 모용수 요장이 각각 독립했다. 그리고 부견은 385년 요장에 의해 살해되었다.
여광은 부견이 협서성(陜西省) 기산(岐山)의 오장산(五將山)에서 전 달에 죽은 사실을
여광은 모르고 있었다. 전진은 그 후, 9년을 더 유지하였다. 부견의 죽음은 처음에는 비밀이었다. 중원이 혼란에 빠지는 무렵, 여광이 부하를 인솔하고 서역 귀환을 완수하기 위해서는 이
양주(涼州) 부근에 머물지 않을 수 없었다. 이를 위해서는 전진 부견을 모시고 자신이 양주자사가 되는 것이 당면한 필수 방책이었다. 12월 여광은 양주 자사 호강교위가 되고, 이때까지 여광의 오른팔이 되어 활약했던 두진(杜進)을 무위태수로 임명했다. 부견을 주인으로 받들어 이러한 임명을 요청했다. 이런 내용을 기록한 주청의 글을 전진에 보냈을 것이다.
다음으로 여광은 그 지방의 유력자의 한 사람으로 보이는 위우(尉祐)라는 사람을 발탁해서
무위군의 주부(총무부장)에 임명했다. 그는 전 양주자사 양희를 무너뜨리는데 공이 있는
인물이다. 그런데 그가 이와 같이 임명해 놓고도 양주의 명사로 불리는 요호(姚皓) 등 10여인을 차례로 죽여 버렸다. 사서에는 이 사건으로 인해서 양주에 있던 호족들이 일제히 이반하게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사건은 일찍부터 양주의 전도에 암운이 드리우는 계기가 되었다.
이곳의 위우(尉祐)도 어느 정도 기간이 경과하자 여광과 틈이 생기게 되었다. 여광은 금성태수로서 감숙성의 고란현에 전출시켜 버렸는데, 얼마 안 있어 모반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다음으로는 여광의 앞날을 크게 바꾸게 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그것은 바로 전량 최후국왕
장천석(張天錫 재위 353〜376)의 장자 장태여(張太予)의 전량 회복 움직임이었다. 아버지
장석천은 부견이 비수의 전쟁에서 패하자 귀향해서 얼마 안 있어 동진에 나라를 맡겼다.
그러나 장태여는 아버지와 행동을 같이하지 않고, 낙양에 왕목(王穆)과 선비족 독발사부건(禿髮思復鞬)의 도움을 얻어서 후량을 재흥하기로 했다. 마침내 3만의 무리를 이끌고 여광이 있는
고장성을 압박해 왔다. 여광은 처음부터 강공책을 써서 반격에 나섰다. 이 전투에서 사부건의
아들 해우(奚于)의 무리 2만인을 참하는 대승을 거두었다. 386년 5월의 일이었다. 장태여는
이 전쟁에서 패하여 감숙성 임도현에서 광무(감숙성 고란현)지방으로 도주했으나, 결국 붙잡혀 고장에서 참살되었다(이듬해 8월)
드디어 여광이 부견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것은 386년 9월의 일이다. 실로 1년 1개월 후의
부고였다. 여기에 대해서 {진서} 여광조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여광은 여기에 이르러 비로소 부견이 요장에게 죽음을 당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분노하고
애통해 했다. 삼군은 상복을 입고 성 남쪽에서 크게 곡하였다. 여광은 부견에 시호를 문소황제
(文昭皇帝)라 했다. 장리백석(長吏百石) 이상은 3개월 상복을 입고, 서민은 3일 동안 곡읍하
도록 했다.
{고승전} 라집전에도 간단하나마 같은 내용을 전하고 있다. 여광은 “분노하고 애통해 했다.”
라는 대목으로 보아 부견의 죽음을 마음으로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