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군대 십자군의 만행
                                           
  637년 이래 예루살렘을 차지한 사라센 아랍계 회교도들은 성지를 방문하는 유럽의 기독교인들을 상업적인 목적에서 매우 좋은 대우를 하였다. 그러나 1076년 터키계 회교도가 힘을 갖게 되면서 많은 까다로운 여건을 만들었다.
한편 터키인은 힘이 막강하여 동로마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블(이스탄불)시를 위협하였다.
 로마제국의 황제 알렉시우스 1세(1048~1118)는 군사력이 약하였기 때문에 로마교황 우르바누스 2세(1088~1099)에게 응원군을 요청하였다. 이 보고를 받은 로마교황은 1095년 프랑스의 클레르몽에게 종교 회의를 열어 성지 순례의 어려움을 알리고, 동방교회를 돕기를 호소하였다. 그리하여 십자군을 모집하게 되었다.
 교황이 십자군을 동원한 목적은 당시 두 교파로 분리되어 있는 로마 기독교와 희랍 정교를 하나로 통합하여 강력한 로마 카톨릭교를 형성하고 로마제국의 황제권까지 제압하는데 있었다.
또한 교황의 명령으로는 군대를 동원할 수 없기 때문에 로마제국 황제의 막강한 군대를 이용할 수가 없어 십자군 모집령을 내린 것이다. 교황은 종군하는 사람들을 특별대우를 해주어야만 했기 때문에 다음과 같은 선언을 하였다.
 1) 십자군 참가자의 재산은 교황이 보장해준다.
 2) 종군자는 과거나 미래의 모든 죄가 사해진다.
 3) 형무소에 있는 자가 참가를 원하면 죄는 즉시 사해지고 다른 혜택을 받는다.
 4) 종군자는 모든 빚이 탕감되고 죽으면 천국에 간다.
 5) 동방에는 고귀한 보물과 미녀가 많으며 전리품으로 마음대로 소유할 수 있다.
 십자군 모집령에 우선 가난한 민중과 농부들이 떼를 지어 몰려왔다. 그들 가운데는 순수한 신앙심에 불타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일확천금을 노리는 사기꾼, 불량배와 빚쟁이. 죄수들이 더 많았다. 그들은 군인으로서의 기본적인 훈련도 받지 않고 성지탈환의 명분만 가지고 동원된 일명 잡스런 무리였다.
이 십자군은 약 200년간 9번이나 성지를 향해 출전하게 된다.

   *제 1회 십자군*
 제 1회 십자군(1096~1099)은 유럽의 3군데에서 출전하였기 때문에 3군단으로 편성되었고, 군사력의 집합처는 동로마 제국의 수도 콘스탄틴노블 시(市)였다. 독일, 남프랑스, 북프랑스에서 몰려온 3군단은 쉽게 콘스탄틴노블에 집결하게 되었다. 1096년, 이 십자군은 그곳에서 진격을 시작하여 3년만인 1099년 6월 7일에 예루살렘에 도착하여 치열한 전투 후 7월 15일 예루살렘을 점령하였다.
 십자군은 엘악사 사원 내에 있던 7만 명의 이슬람교도와 학자, 고행자들을 죽였다. 약탈한 보물은 동굴을 가득 채웠다.
 기독교도들의 연대기에도 이 세계 역사상 유례를 볼 수 없을 정도로 대학살이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다. 그들은 ‘학살은 신의 뜻일 뿐이다’라는 교황의 선언에 의해 죄의식이 전혀 없었다. 모세의 율법에도 살인은 별로 문제되지 않았다. 신전 내에는 학살된 자가 하도 많아 그 피가 무릎 위까지 찰 정도였다. 아랍의 여인들은 강간당한 후 칼로 토막을 냈는데, 아랍인들은 죽기 직전에 보물이 빼앗길까봐 미련하게도 그것을 삼켰다. 이것을 안 십자군은 아랍인을 잡으면 몸을 토막 내어 위와 창자 속에서 귀한 보물을 꺼내려 했던 것이다. 그들은 며칠 사이에 그곳에 있는 아랍인들을 아이들까지 모두 죽여 버렸다.
 아랍인에 대한 학살이 끝났을 때, 유대인들은 아랍인들과는 다른 대우를 받으리라 생각하였다. 그러나 십자군은 유대인들을 시나고그(유대교인의 회당會堂: 예배의식, 각종집회, 교육훈련 등이 이루어졌던 장소)에 넣고 불을 질러 모두 태워 죽였다. 이처럼 유럽인에 있어 신의 명은 절대적이고, 학살은 신이 원한 것이라 여겼다.
 예루살렘은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의 공통 성지이다. 누가 예루살렘을 통치하건 각 신도의 순례는 자유이고 이것을 보장하는 것이 도리였으며 아랍인들은 기독교인들에게 매우 관대하였다. 그러나 십자군은 이 관례를 어기고 성지를 자기들이 독점한 것이다. 십자군은 소정의 목적을 달성하였으나 30만의 대군에서 6만 명만이 살아남아 피해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각지에서 모인 이슬람군이 공동전선을 펴서 예루살렘은 위기에 놓이게 되었다.

  *제 2회 십자군*

 프랑스의 루이 7세(1120경~1180)와 독일의 콘라드 3세(1138~1152)가 제 2회 십자군을 형성하여 방어를 위한 출정에 나섰다. 그러나 독일 십자군은 소아시아 전투에서 전멸하고 프랑스 십자군은 25000명의 병력이 시리아에 도착하였을 때는 5000명으로 감소되었다. 그래서 두 왕은 패잔병을 이끌고 돌아왔다.
 회교도의 명장인 살라딘(1138~1193)은 도망치는 십자군을 물리치고 1187년 10월 3일, 예루살렘과 그 왕국을 점령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