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여광의 죽음과 후량

 399년 12월 여광은 63세를 일기로 파란만장한 생애를 마쳤다. 서역원정을 마치고 귀국길에 올랐다가 고장성에 군림한 지 14년이 경과했다. 임종 직전, 여광은 태자였던 적자(嫡子) 여소(呂紹)에게 천왕의 자리를 내어주고 자신은 태상황제가 되었다. 그리고 서자로서 장자인 군사에 뛰어난 태원공 여찬(呂纂)을 태위에 임명하고, 같은 차자(次子) 상산공 여홍(呂弘)을 사도에 임명해서 천왕의 가까이서 여소를 보좌하라고 유언했다.
 그러나 여광이 숨을 거둔 후 채 5일이 지나지 않아 유언은 파괴되고 말았다. 은연중 국내외에 실력을 기르고 있었던 여찬이 여소를 살해하고 스스로 왕위에 올랐기 때문이다. 마침내 여찬은 후량 제2대 국왕이 되었다. 연호를 함령(咸寧)이라고 고치고, 아우 여홍 이하 백관의 임명을 단행했다. 여찬은 무인으로서 군사에는 뛰어났지만, 성격이 거칠고 포악했다. 그래서 부친 여광도 임종에 이르러 그에게 당부하기를, “너는 성격이 거칠어서 내가 깊이 근심된다.”({십육국춘추집보} 후량록) 라고 했다고 한다. 여찬에 대해서는 앞서 반란을 일으켰던 곽형도 “주상은 늙어 병들고, 태자는 아둔하고, 여찬은 흉무(凶武)하다.”고 평했을 정도로 여찬의 흉악함은 이미 내외에 잘 알려져 있었다.
 여찬은 즉위하자마자 일찍이 자신의 라이벌이었던 아우 여홍을 추방시켜 버리고 얼마 안 있어 죽여 버렸다. 이와 같이 왕실 일족의 골육상쟁이 표면화되어 그 내분이 그치지 않았다.
 401년 2월 번화군(番禾郡)의 태수 여초(呂超)가 소환되었다. 그는 왕의 종형제로 전에 여찬에 살해 되었던 전왕 여소쪽에 가담했기 때문에 왕과 대립적인 입장이었다. 이때 선비족의 독발사반(禿髮思盤)이 여소를 참소하여, 왕은 그를 고장성으로 들어오라고 명을 내렸다. 그런데 이 일이 엄청난 일을 몰고 왔다. 소환된 여초는 국왕 여찬이 자신을 처벌할 것이라는 두려움에 쌓여 중령군 장군이었던 그의 형 여융(呂隆)과 전중반 두상(杜尙)을 설득하여, 국왕 여찬의 암살을 모의하게 되었다. 마침내 기회가 왔다. 왕이 경호를 소홀히 한 틈을 이용해 여찬을 살해하는데 성공했다. 이때의 사정을 다음과 같이 전한다.

여찬은 전 황제의 명을 어기고 태자(여소)를 살해했다. 항상 술에 취해 방탕한 생활을 하고 소인배들을 가까이 하여 충성스런 신하들을 멀리하며 백성들을 초개와 같이 여겼다. 이에 번화의 태수 여초는 골육상쟁을 일삼고 사직을 전복시킬까 두려워 마침내 왕을 제거했다. 위로는 종묘를 편안하게 하고 아래로는 태자의 원한을 갚기 위한 것이다. 무릇 우리 백성들은 여기에 기꺼이 동참하기를 바란다({진서} 여찬 조)

라고 하였다. 이 무렵 후량의 정세에 대해 {출삼장기집}에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얼마후 여광이 숨을 거두었다. 그의 아들 찬이 왕위를 억지로 빼앗았다. 함령 2년(400) 돼지가 새끼를 낳았는데, 몸은 하나인데 머리가 셋이나 되었다. 또 동쪽 회랑 우물 속에서는 용이 나와 대전 앞에 몸을 나타냈으나, 다음날 아침이 되니 어디로 사라지고 없었다. 여찬은 이것을 좋은 상서라고 여겨 대전을 용상전(龍翔殿)이라 불렀다. 갑자기 흑룡이 나와 궁전의 구궁문(九宮門)에서 승천했다. 찬은 구궁문을 고쳐서 용흥문(龍興門)이라고 불렀다. 라집법사가 아뢰었다. “요즘 물속에 있어야할 용이 나와 다니고, 돼지도 이상한 모습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용은 음류(陰類)로 출입할 때가 아닙니다. 그런데도 지금 자주 나타나는 것은 곧 재해가 일어날 징조입니다. 반드시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모반할 변괴가 있을 것입니다. 마땅히 자신을 이기고 덕을 닦아서 하늘의 경계하심에 답하시기 바랍니다.”

 {고승전} 라집전에도 이와 똑같은 기사가 기록되어 있다. 여찬은 용이 출몰하는 것이 상서로 생각하여 대전을 용상전이라 했고, 구궁문을 용흥문 등으로 고쳐 부르게 했다. 용은 보통 왕자의 상징으로 여겨졌으나, 여기서는 그렇지 못하였다. 전에 여광이 구자국을 원정할 때 구자성 부근에서 엄습했던 카라프랑을 좋은 징조를 나타내는 흑룡이 출현한 것으로 보았던 일이 있다. 또한 여광은 천왕에 즉위했던 396년을 용비(龍飛)로 개원하기도 했다. 여씨는 아마도 용을 대단히 존중하여 마치 자신의 부족을 수호하는 신과 같이 여긴듯하다. 그렇다면 용이 아마도 여씨족의 토템이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궁전 대문의 이름을 변경해야 할 정도로 당시 후량의 인심이 동요했다는 것을 말해주는 사건이기도 하다. 라집법사는 이 용의 출현을 하늘이 경계하고자 한다고 해석하고, 단지 이름이나 바꾸려하기보다는 자기를 이기고 덕을 닦으라고 진언했다.
 {출삼장기집} {고승전} 라집전에는 이러한 라집의 진언을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하는데, 이와 반대로 {진서} 여찬의 기록에는 이를 받아들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