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항상 모든 악을 여의고 항상 온갖 선을 행하라.
몸과 입과 뜻의 업으로 이루어지는 이 두 가지 법을 마땅히 알아야 하네.
常離一切惡 恒行一切善 由身口意業 應知此二法
* 우리가 짓는 모든 업은 몸으로 짓는 신업, 입으로 짓는 구업, 뜻으로 짓는 의업이 있다. 이 세 가지 업으로 우리는 선업을 짓든지 악업을 지어 선한 과보 악한 과보를 초래하게 된다. 따라서 악업을 짓지 않고 선업을 지음으로써, 선근을 쌓고 지혜를 닦아야 생사윤회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이 평범한 말씀은 삼세 부처님이 불도를 이룬 가장 귀중한 법문인 칠불통게(七佛通偈)에도 들어있다. 과거칠불이 부처가 되기 위해 닦은 중요한 가르침이 바로 두 가지 법이고, 이를 통하여 그 마음을 청정히 닦음으로써 부처가 되었다는 것이다. 칠불통게를 상기하면 다음과 같다.
제악막작 중선봉행(諸惡莫作 衆善奉行) 자정기의 시제불교(自淨其意 是諸佛敎)
모든 나쁜 짓을 하지 말고 착한 일을 받들어 행하며,
스스로 그 마음을 깨끗이 하라. 이것이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이니라.
22. 첫 번째 법을 말미암아 지옥 등 사취(四趣)를 능히 벗어나고,
두 번째 법으로써 인(人)ㆍ천(天)ㆍ왕(王)의 부귀와 안락을 능히 감응(感應)하네.
由一法能脫 地獄等四趣 第二法能感 人天王富樂
* 첫 번째 법이란 모든 악을 멀리 여의는 것이다. 신업 구업 의업으로 말미암아 악업을 일으키는데 이 악업을 멀리하면 그 과보로 악도에서 벗어나고, 갖가지 선을 행하면 선업이 증장되어 그 과보로 선취에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보통 신업 구업 의업으로 악을 행하여 상품의 악행은 과보로 우리의 미래에 육도 중에서 가장 괴로운 세계인 지옥에 나아가고, 중품의 악행은 축생의 세계에 나아가고, 하품의 악행은 아귀의 세계에 나아간다고 한다.
또한 삼업으로 갖가지 선을 부지런히 행하면 우리의 미래에 선취에 나아가니, 상품의 선행은 그 과보로 미래에 천상에 나아가 행복을 누리고, 중품의 선행은 인간세계에 나아가고, 하품의 선행은 아수라의 세계에 나아간다는 것이다.
지옥 등 사취란 지옥 축생 아귀 아수라를 악업으로 인해서 이루어지는 악도의 고해로 분류하였다. 여기서 벗어나야 할 악도를 사취로 본 것은 전통적으로 지옥 아귀 축생 수라까지를 악업의 과보로 얻어지는 사악도라고 한 것에 따른 것이다. 또한 인간 천상 왕의 복락을 감응한다는 것은 선업(십선업)을 지어서 받는 선취를 말한다. 천상에는 욕계의 육욕천, 색계의 사선천, 무색계의 사공천이 있다. 왕은 여기서는 전륜성왕으로, 법화경에는 네 전륜성왕이 등장한다. 전륜성왕은 전 세계를 통일하여 지배한다는 이상적인 제왕, 무력에 의하지 않고 정법으로 천하를 다스리는 제왕이다. 여기에는 금륜왕(金輪王) 은륜왕(銀輪王) 동륜왕(東輪王) 철륜왕(鐵輪王)의 네 왕이 있고 차례로 위신력에 차이가 있다고 한다.
23. 선정과 청정한 행으로써 공(空)에 머물러서 범천 등의 안락을 받으니,
이와 같이 간략하게 설하여 안락의 원인과 안락의 결과라고 한다네.
由定梵住空 得受梵等樂 如是略說名 樂因及樂果
* 선법을 닦으면 청정한 선법이 증장되고, 청정한 법으로 선정과 지혜가 개발되어서 일체법이 인연 따라 생겨서 인연 따라 변하고 인연 따라 소멸함을 안다. 일체법이 무상하고 무아임을 알아서 공에 주하므로 이를 석공(析空)의 경지라 한다. 공에 주하면 생사의 번뇌인 사혹과 견혹을 끊어서 삼계의 생사를 해탈하게 된다. 여기서는 선정과 청정한 범행으로 집착함이 없는 공의 경지를 얻어 천상의 안락을 누리는 것을 말한다. 선정과 청정한 범행은 안락의 원인이 되고 범천의 안락을 받는 것은 그 안락의 결과임을 말한다.
24. 다음으로 해탈법은 미세하고 깊어서 만나기 어려우니,
제대로 듣는 마음이 없는 범부가 들으면 곧 공포를 일으킨다네.
復次解脫法 微細深難見 無耳心凡夫 聞則生驚怖
* 일체법이 무상하고 무아임을 깨달아서 해탈을 얻는 해탈법은 삼계의 진리를 아는 심오하고 미묘하여, 중생의 안목에서는 이해하기 힘들다. 이러한 미묘법은 욕계 · 색계 · 무색계의 진리를 알아야 벗어날 수 있으니 청정범행으로 깊은 선정에 들어가야 한다. 따라서 일체법이 무상하고 무아이고 고라고 하면 범부들이 추구해온 현상의 부귀영화가 버려야할 대상이 되므로 공포심을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25. 실재하는 내[我]가 없으니 미래에도 태어남이 없고, 현재와 미래에도 나의 것[我所]이 없네.
범부는 이를 생각하면 두렵지만 지혜 있는 사람은 두려움이 영원히 다하였다네.
我無當不生 現來我所無 凡人思此畏 智者怖永盡
* 내가 무아임을 깨달으면 일체법이 무상하고 무아이니 탐·진·치의 미혹한 번뇌가 일어나지 않고 신·구·의 삼업이 청정해서 미래의 분단생사를 끊으므로 생사로부터 벗어나고, 무아이므로 아소(我所) 또한 실체가 없으니 나의 현재와 미래에 실재하는 것이 없어진다. 지혜 있는 자는 이를 깨달아 선정과 지혜로 살펴서 두려움이 없지만, 범부는 나와 나에 속한 일체가 없다고 하므로 공포를 느끼게 된다.
26. 세간은 내가 있다는 견해[我見]에서 생겨나서 다른 일에 집착하고 속박 되지만,
부처님은 지극한 도(道)를 증득 하셔서 자비에 의지하여 다른 사람을 위하여 설하시네.
世間我見生 他事執所繫 佛由至道證 依悲為他說
* 사람들은 세간법들에 대해서 보고 듣고 만져지는 것은 실재한다고 생각하여 이들에 집착하므로 재산과 부귀영화를 끝없이 추구하니, 탐내고 화내고 어리석은 생각으로 대상에 결박당하여 생사고해를 벗어나지 못한다. 부처님은 이러한 세간법은 인연 따라 생겨서 인연 따라 없어지는 실체가 없는 것임을 깨달아서 생사고해를 해탈하고 이 진리를 설하고 있다는 것이다.
27. 내가 있고[我有] 나의 것[我所]이 있다는 이 둘은 참으로 모두 허망한 것이니,
여실(如實)하게 이치를 보게 되면 두 가지 집착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네.
我有及我所 此二實皆虛 由見如實理 二執不更生
* 두 가지 집착이란 내가 있고 나의 것이 있다는 견해, 이 두 가지는 잘못된 견해라고 한다. 내가 있다는 것은 오온이 나라고 생각하는 신견(身見)과 일체법이 실재한다고 보는 견해들로 모두 인연 따라 생기고 인연 따라 멸하는 이치를 여실하게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28. 모든 음(陰)은 아집에서 생기며, 아집은 뜻이 허약한데서 연유한다네.
만약 종자가 부실하다면 싹들이 어떻게 견실하겠는가.
諸陰我執生 我執由義虛 若種子不實 芽等云何真
* 모든 음이란 오음 곧 오온을 말한다. 오온이 있다고 믿는 것은 잘못된 집착이다. 이는 진리를 모르고 대상이 실재한다고 믿는데서 생긴다. 곧 진실한 마음이 허약하여 대상 따라 흔들리므로 대상을 바로 알지 못하여 집착하게 되는 것이다.
29. 만약 오음이 실재하지 않는다고 보면 아견은 곧 생기지 않고,
아견이 멸해서 다하면 모든 음도 다시 일어나지 않네.
若見陰不實 我見則不生 由我見滅盡 諸陰不更起
* 오온은 인연 따라 생겨서 내지 멸하는 것임을 깨닫는다면 오온은 실재하지 않는 무상하고 무아임을 알게 된다. 오온이 무상하고 무아이므로, 나 또한 무상하고 무아이다. 내가 무상하고 무아이므로, 내가 있다는 아견이 다하면 일체법 또한 무상하고 무아임을 깨닫게 된다.
30. 마치 사람이 깨끗한 거울에 의지하여 자신의 얼굴모습을 볼 수 있듯이,
이 거울의 모습은 다만 볼 수 있을 뿐 한결같이 실재하는 것이 아니네.
如人依淨鏡 得見自面影 此影但可見 一向不眞實
31. 아견(我見)도 이와 같아서 오음에 의지하여 나타나지만,
여실히 살펴보면 있는 것이 아니니 마치 거울 속에 모습과 같네.
我見亦如是 依陰得顯現 如實撿非有 猶如鏡面影
32. 어떤 사람이 거울에 집착하면 자신의 얼굴모습을 볼 수 없는 것처럼,
이와 같이 오음에서 떠나면 아견이 존재하지 않는다네.
如人不執鏡 不見自面影 如此若析陰 我見即不有
33. 이와 같은 뜻을 들음으로 크게 청정해진 아난은
청정한 법안을 얻고 항상 남을 위하여 이를 설하네.
因聞如是義 大淨命阿難 即得淨法眼 恒為他說此
* 아견을 여의면 오온이 공함을 깨닫게 되고, 대상에 대한 집착을 여의게 되므로, 일체법에 대해서 집착하지 않으니 청정한 안목이 이루어진다. 아난은 지경제일의 제자이므로 부처님의 법을 잘 지니어 청정한 안목을 얻었다. 이와 같이 청정한 안목으로 중생들을 보면 어리석은 중생들이 아견을 내고 오온에 집착하므로 이를 설하여 제도하게 된다.
34. 오음에 집착하여 오온이 존재한다고 하면 아견 또한 항상 존재하니,
아견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업과 영원한 내가 있다고 하네.
陰執乃至在 我見亦恒存 由有我見故 業及有恒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