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 선남자야, 비유하면 법은 물이 능히 더러운 때를 씻음과 같음이라. 혹은 샘이거나 혹은 못이거나 혹은 강이거나 혹은 시내거나 혹은 개울이거나 큰 바다가 다 능히 모든 더러운 때를 씻음과 같이, 그 법의 물도 또한 이와 같아 능히 중생의 모든 번뇌의 때를 씻음이라.
善男子,法譬如水能洗垢穢,若井若池若江若河溪渠大海,皆悉能洗諸有垢穢∘其法水者亦復如是,能洗衆生諸煩惱垢∘
[강의] 이하부터는 비유를 들어서 법이 수승하고 열등함을 나타내었다. 여기에는 2단이 있다. “비유하면 법은 물이 …모든 더러운 때를 씻음과 같이”까지는 비유를 연 것[開譬]을 밝혔다. “그 법의 물…모든 번뇌의 때를 씻음이라”는 간략히 비유의 뜻을 합한 것[合譬]을 밝혔다. 이는 곧 다른 것을 들어서 같은 비유임을 나타내었다.
“샘, 못, 강, 시내, 개울, 큰 바다”란 다른 비유를 나타내고, “때를 씻는 모든 물”이란 같은 비유를 나타냈다.
샘 못은 삼장교를 비유하고, 강은 통교를 비유하며, 시내 개울은 별교를 비유하고, 큰 바다는 원교를 비유한다. 샘 못이 흐르지 않음은 이승 별관의 석법(析法)으로 사제 십이연기 공을 비유한다. 강물의 물리 흘러 움직임은 삼승 공관의 체법(體法)으로 반야공을 비유한다. 시내(계곡류) 개울이 많이 흘러감은 보살 가관(假觀)의 무량사제를 비유한다. 큰 바다의 원만한 물은 늘지도 않고 또한 줄지도 않으니 원교 근기 보살의 세로로 본 실상관을 비유한다. 모든 존재들이란 이십오유(二十五有)의 존재를 말하고, 더러운 때란 번뇌의 장애가 되는 때, 소지장의 더러운 번뇌를 말한다. 모든 번뇌란 98사(使)를 말한다.
25유 존재란 삼유의 중생들을 말한다. 천태사교의 에서는 “이십오유는 사주 사악취 육욕천 범천 사선천 사공천 무상천 오나함천(4주와 4취가 8이 되고, 6욕과 범왕천이 15가 되며, 4선과 4공처가 23이고, 무상천과 나함천이 25를 이룬다)이 있다. 이를 나누어 보면 25유이고, 총괄해 보면 육도생사이다”라고 하여, 생사윤회하는 육취중생을 가리킨다.
88사란 삼계 6도의 생사고해를 초래하는 중생들의 번뇌로 88사(使, 혹은 견혹)와 근본10번뇌(번뇌 탐 진 치 만 의 신견 변견 신견 견취견 계금취견)를 말한다. 견혹 88사는 욕계 32번뇌, 색계 28, 무색계 28번뇌가 있다. 이와 같이 삼계(三界)에는 모두 88번뇌가 있어 중생을 번거롭게 부리므로 88사(使)라 한다.
*번뇌장 소지장이란 번뇌장(煩惱障, āvaraṇa-dvaya)은 아집(我執)으로 인해 일어나는 번뇌로 열반(涅槃)의 증득을 장애하는 번뇌. 곧 견혹과 사혹을 말한다. 소지장(所知障, dvidhā-dauṣṭhulya)은 법집(法執)으로 인해 일어나는 번뇌로 보리(菩提)의 발현을 장애하는 번뇌. 곧 진사혹(塵沙惑) · 무명혹(無明惑)을 말한다. 달리 말하면, 번뇌장은 생사고해의 번뇌로부터의 해탈을 장애하는 번뇌이고 소지장은 불도에 들어가는 완전한 깨달음의 증득을 장애하는 번뇌이다.
[경] 선남자야, 물의 성품은 하나이건만 강과 내와 샘과 못과 시내와 큰 바다는 각각 다름이라. 그 법의 성품도 도한 이와 같아서 진로(塵勞)를 씻어 없애기는 같아서 차별이 없을 지라도 삼법(三法) 사과(四果) 이도(二道)는 하나가 아니니라.
善男子,水性是一,江河井池溪渠大海各各別異∘其法性者亦復如是,洗除塵勞等無差別,三法四果二道不一∘
[강의] 비유와 그 뜻을 합하여 밝혔다. 같은 것을 들어서 다른 뜻을 드러냈다. 물의 성품이 하나란 같은 비유를 든 것이다.
“강과 내와 샘과 못 등”이란 다른 비유를 나타낸 것이다.
“그 법의 성품이 또한 이와 같아서”란” 바로 그 비유의 뜻과 합한 것이다. 법성을 사용해서 물의 성품이 진로를 씻어내는데 강 등이 다름을 비유했다.
“삼법”이라고 한 것은 첫째는 사제법이고, 둘째는 십이인연법이며, 셋째는 육바라밀이다.
*삼법은 곧 방편법을 말한다. 사제법은 성문승법을 말하고, 십이인연법은 연각승이며, 육바라밀은 보살승을 가리킨다. 법화경 비유품에서는 차례로 양의 수레, 사슴의 수레, 소의 수레로 비유했었다. 여기서는 샘과 못처럼 흐르지 못하는 것은 이승이라 했으므로 성문승 연각승이라고 할 수 있다. 강과 내는 통교를 가리킨다고 했고 시내는 별교를 가리킨다고 했으므로 보살승이며, 대해는 원교를 가리킨다고 했으므로 일불승이라고 할 수 있다.
“사과”란 첫째 수다원과로 신역으로는 예류과라고 부른다. 둘째는 사다함과 신역으로는 일래과라 하며, 셋째는 아나함과로 신역으로는 불환과라 하고, 넷째는 아라한과이니 신역으로는 이름이 같다.
①예류과(預流果:수다원須陀洹)란 욕계의 인간과 천상을 7왕래한다. 여기서는 삼결(三結: 견見․계금취견戒禁取見․의결疑結)을 끊은 자(견도의 마지막이고 수도의 시작)
②일래과(一來果:사다함斯陀含)란 세상에 한번 더 태어남. 삼결(三結)을 끊고, 삼독(三毒: 탐貪․진瞋․치痴)가 박약해짐.
③불환과(不還果: 아나함阿那含)란 세상에 오지않고 천상에 가 열반에 든다. 오하분결(五下分結: 신견身見․계견戒見․의疑․탐貪․진瞋․치痴)을 끊은 자.
④아라한(阿羅漢, 무학과)란 번뇌가 없어지고 심해탈 혜해탈을 얻은 자를 말한다.
“이도(二道)”란 첫째 방편도, 둘째 진실도이다.
“하나가 아니다”란 하지(下智)에서 관하면 삼도(三道)의 외범(外凡)·내범(內凡)·분성극성(分聖極聖)이 하나가 아니라는 것이다. 중지(中智)에서 관하면 삼도(三道)의 외범(外凡)·내범(內凡)·분성극성(分聖極聖)이 하나가 아니라는 것이다. 상지(上智)에서 관하면 삼도(三道)의 외범(外凡)·내범(內凡)·분성극성(分聖極聖)이 하나가 아니라는 것이다. 상상지(上上智)에서 관하면 삼도(三道)의 외범(外凡)·내범(內凡)·분성극성(分聖極聖)이 하나가 아니라는 것이다.
*내범 위범은 범부위 (凡夫位)에 있는 사람을 구별하여 내범 (內凡)과 외범 (外凡)이라 한다. 범 (凡)은 성 (聖)에 대비되는 것으로, 아직 불교의 교리를 증득하지 못한 사람을 말하고, 그 가운데서 약간의 지혜를 가진 사람을 내범이라 하고, 그렇지 못한 사람을 외범이라 한다. 이 중에서 외범(外凡)이란 견도(見道) 이전의 수행위(修行位). 소승불교에서는 오정심(五停心), 별상념처(別相念處), 총상념처(總相念處)를 이르고, 대승불교에서는 통교로는 초 간혜지(乾慧地)이고 오십이위로는 처음인 십신위(十信位)의 초분을 말한다.
내범(內凡)이란 불법의 진리 체득하지 못한 범부(凡夫) 가운데 진(眞)의 깨우침에 가까운 사람. 소승불교에서는 사선근위, 곧 난위·정위·인위·세제일위의 계위를 말하고, 대승불교에서는 통교로는 둘째 성지(性地)이고 오십이위로는 처음인 십신위(十信位)의 후분을 말한다.
오정심관(五停心觀)은 마음의 번뇌를 정지시키는 관법으로 다음의 다섯 가지가 있다.
①부정관(不淨觀, 백골관): 탐욕 색욕심이 많은 중생이 육체의 부정을 관하여 탐심을 쉬게 하는 것.
②자비관(慈悲觀): 진심이 많은 사람에게 불쌍히 여기고 사랑하는 마음을 낸다.
③인연관(因緣觀): 어리석음이 많은 자에게 십이연기를 관하여 우치심을 없앤다.
④수식관(數息觀): 산란한 마음이 출입하는 숨의 숫자를 쉬면서 마음을 수정하는 것.
⑤계분별관(界分別觀): 아집(我執)이 많은 자에게 인연화합임을 관하여 아견을 없앰.
사념처관(四念處觀)은 별상념주: 자상별관과 공상별관이 있다. 자상별관自相別觀은 신身·수受·심心·법法의 자상自相에 대하여 부정不淨·고苦·무상無常·무아無我라고 관하는 것. 공상념처관共相別觀은 일체의 법이 공통된 상으로 부정하고, 고통스럽고, 무상無常하고, 고苦라고 관하는 수행. 이를 총합하여 닦는 것을 총상념처관이라 한다.
사선근위(四善根位)란 사선근이 무루지無漏智를 증득하는 근본이라는 것. 그 증득하는 단계에 따라 다음의 네 계위가 있다.
①난위(煖位): 관혜觀慧로 시제四諦를 관하는 지혜.
②정위(頂位): 관혜의 사제를 관함이 정상에 도달함.
③인위(忍位): 사제의 이치를 인가認可(다시는 퇴타하지 않음)할 만함.
④제제일법(世第一法): 유루법중 가장 수승한 상태. 견도에 진입하는 무루지가 충만해짐. 이 다음에는 무루지로 번뇌를 끊어서 성인위에 들어간다.
*분성위란 원교 수행의 6즉(卽)으로 분진즉(分眞卽)을 말한다. 수행자가 1분씩 무명(無明)을 끊고, 1분씩 본래 갖추어 있는 불성을 증득하여 나타내는 자리. 원교(圓敎)의 10주(住)ㆍ10행(行)ㆍ10회향(廻向)ㆍ10지(地)ㆍ등각(登閣)ㆍ41위(位)를 말한다. 이 위는 41품(品)의 무명을 1품씩 끊어 들어가는 계위이다. 극성위란 육즉을 닦아 궁극으로 6종 성(性)의 맨 윗자리인 묘각(妙覺)의 지위에 이른 것을 말한다. 이 계위는 무명(無明)을 깨뜨려 없애고 증득한 극성으로 사실상 불과(佛果)의 위(位)라고 한다.
다른 경본에서는 하나가 아님을 이법 삼도 사과라고 한다. 이법이란 돈교의 법, 점교의 법이라 한다. 돈교는 화엄 돈교 중의 일체법을 말한다. 점교의 법이란 삼장·방등·반야의 일체법을 가리킨다. 삼도란 곧 삼승을 말한다. 사과란 아라한과·벽지불과·보살살과·불과의 넷이라고 한다. 또는 삼장불과·통교불과·별교불과·원교불과의 넷이라고도 한다. 비록 많은 해석이 있으나 능소能所를 벗어나지 못한다. 능히 한 법을 낳아서 무량한 법이 생겨서 열고 닫으니 비록 서로 다르지만 그 뜻에는 다르지 않다. 이법이란 사제 십이인연을 합하여 점이라 하고, 육바라밀을 돈이라 한다. 부部(교설)의 돈교는 화엄부를 말하고, 부의 점교는 삼장·방등·반야를 가리킨다. 삼도는 하지 상지까지 2관을 소승이라 하고, 상지의 관하는 도를 보살이라 한다. 방편의 일도를 열어서 일승이 되고 진실한 도는 근본을 지키고 이 삼을 더한다. 사과는 생긴 것이기 때문에 대승 소승에 통하고 이런 까닭에 서로 어긋나지 않는다.
[경] 선남자야, 물은 비록 다 씻을 수 있다 할지라도 그러나 샘은 못이 아니요, 못은 강하(江河)가 아니며, 시내는 바다가 아니니라. 여래 세웅(世雄)이 법에 자재함과 같이 설한 모든 법도 또한 이와 같음이라. 처음이나 중간이나 끝에 설함이 다 능히 중생의 번뇌를 씻어 제함이나, 처음은 중간이 아니요 중간은 끝이 아님이라. 처음이나 중간이나 끝에 설하되 말은 비록 같을 지라도 뜻은 각각 다름이 있느니라.
善男子,水雖俱洗,而井非池,池非江河,溪渠非海∘而如來世 雄於法自在,所說諸法亦復如是∘初 中 後說,皆能洗除衆生煩惱,而初非中,而中非後,初 中 後說,文辭雖一而義各異∘
[강의] 이 단락은 비유와 그 뜻을 합하여 밝혔다. 여러 가르침의 수승하고 열등함을 밝혓다. 샘과 못의 물은 다만 견혹 사혹을 씻어내고, 강하의 물은 견혹 사혹의 때와 침입한 습기를 씻어내는데 체를 절복하는 것이 다르고, 끊고 절복함이 또한 다르다. 시내의 물은 아직 감로미는 아니지만 사주四住의 내뇌內外의 때를 씻어낸다. 여기서 사주 내외의 때는 삼계 내와 삼계밖의 사주지혹을 가리킨다. 그 바다의 물은 짠 맛이 동일하여 능히 오주五住의 일체의 때를 씻어낸다. 오주의 때란 오주(五住)란 오주지혹(五住地惑)의 준말로서 견혹(見惑), 사혹(思惑), 무명(無明)의 번뇌를 다섯 가지로 가지고 나눈 것이다. 곧 욕애주지혹·색애주지혹·무색애주지혹·사혹·무명혹을 말한다.
“여래 세웅”이란 곧 부처님 자신을 가리킨다.
“법에 자재함과 같이 설한 모든 법도 이와 같다”란 등각 묘각의 계위에 오르면 팔자재를 갖추니 이런 까닭으로 법에 자재하다고 한다. 설한 법이란 유미의 화엄, 낙미의 아함, 생소미의 방등, 숙소미의 반야이다. 또한 이와 같다란 비유의 뜻을 합한 것을 말한다.
“음이나 중간이나 끝에 설함이 다 능히 중생의 번뇌를 씻어 제함이나”란 계내의 번뇌를 모두 없애는 것을 말한다. 사제는 간략하여 십이연기과 다르므로 처음은 중간이 아니라고 하였고, 연기법은 광대하여 또한 자리自利여서 육바라밀과 다르니 그러므로 중간은 끝과 다르다고 하였다. 본래 공적하지만 념념이 생멸하여 그 경문이 비록 하나이지만 안팎으로 다르고 성상性相이 각기 다르니 이런 까닭으로 경문에서 “말은 비록 같을 지라도 뜻은 각각 다름이 있다고 하였다.
善男子,法譬如水能洗垢穢,若井若池若江若河溪渠大海,皆悉能洗諸有垢穢∘其法水者亦復如是,能洗衆生諸煩惱垢∘
[강의] 이하부터는 비유를 들어서 법이 수승하고 열등함을 나타내었다. 여기에는 2단이 있다. “비유하면 법은 물이 …모든 더러운 때를 씻음과 같이”까지는 비유를 연 것[開譬]을 밝혔다. “그 법의 물…모든 번뇌의 때를 씻음이라”는 간략히 비유의 뜻을 합한 것[合譬]을 밝혔다. 이는 곧 다른 것을 들어서 같은 비유임을 나타내었다.
“샘, 못, 강, 시내, 개울, 큰 바다”란 다른 비유를 나타내고, “때를 씻는 모든 물”이란 같은 비유를 나타냈다.
샘 못은 삼장교를 비유하고, 강은 통교를 비유하며, 시내 개울은 별교를 비유하고, 큰 바다는 원교를 비유한다. 샘 못이 흐르지 않음은 이승 별관의 석법(析法)으로 사제 십이연기 공을 비유한다. 강물의 물리 흘러 움직임은 삼승 공관의 체법(體法)으로 반야공을 비유한다. 시내(계곡류) 개울이 많이 흘러감은 보살 가관(假觀)의 무량사제를 비유한다. 큰 바다의 원만한 물은 늘지도 않고 또한 줄지도 않으니 원교 근기 보살의 세로로 본 실상관을 비유한다. 모든 존재들이란 이십오유(二十五有)의 존재를 말하고, 더러운 때란 번뇌의 장애가 되는 때, 소지장의 더러운 번뇌를 말한다. 모든 번뇌란 98사(使)를 말한다.
25유 존재란 삼유의 중생들을 말한다. 천태사교의 에서는 “이십오유는 사주 사악취 육욕천 범천 사선천 사공천 무상천 오나함천(4주와 4취가 8이 되고, 6욕과 범왕천이 15가 되며, 4선과 4공처가 23이고, 무상천과 나함천이 25를 이룬다)이 있다. 이를 나누어 보면 25유이고, 총괄해 보면 육도생사이다”라고 하여, 생사윤회하는 육취중생을 가리킨다.
88사란 삼계 6도의 생사고해를 초래하는 중생들의 번뇌로 88사(使, 혹은 견혹)와 근본10번뇌(번뇌 탐 진 치 만 의 신견 변견 신견 견취견 계금취견)를 말한다. 견혹 88사는 욕계 32번뇌, 색계 28, 무색계 28번뇌가 있다. 이와 같이 삼계(三界)에는 모두 88번뇌가 있어 중생을 번거롭게 부리므로 88사(使)라 한다.
*번뇌장 소지장이란 번뇌장(煩惱障, āvaraṇa-dvaya)은 아집(我執)으로 인해 일어나는 번뇌로 열반(涅槃)의 증득을 장애하는 번뇌. 곧 견혹과 사혹을 말한다. 소지장(所知障, dvidhā-dauṣṭhulya)은 법집(法執)으로 인해 일어나는 번뇌로 보리(菩提)의 발현을 장애하는 번뇌. 곧 진사혹(塵沙惑) · 무명혹(無明惑)을 말한다. 달리 말하면, 번뇌장은 생사고해의 번뇌로부터의 해탈을 장애하는 번뇌이고 소지장은 불도에 들어가는 완전한 깨달음의 증득을 장애하는 번뇌이다.
[경] 선남자야, 물의 성품은 하나이건만 강과 내와 샘과 못과 시내와 큰 바다는 각각 다름이라. 그 법의 성품도 도한 이와 같아서 진로(塵勞)를 씻어 없애기는 같아서 차별이 없을 지라도 삼법(三法) 사과(四果) 이도(二道)는 하나가 아니니라.
善男子,水性是一,江河井池溪渠大海各各別異∘其法性者亦復如是,洗除塵勞等無差別,三法四果二道不一∘
[강의] 비유와 그 뜻을 합하여 밝혔다. 같은 것을 들어서 다른 뜻을 드러냈다. 물의 성품이 하나란 같은 비유를 든 것이다.
“강과 내와 샘과 못 등”이란 다른 비유를 나타낸 것이다.
“그 법의 성품이 또한 이와 같아서”란” 바로 그 비유의 뜻과 합한 것이다. 법성을 사용해서 물의 성품이 진로를 씻어내는데 강 등이 다름을 비유했다.
“삼법”이라고 한 것은 첫째는 사제법이고, 둘째는 십이인연법이며, 셋째는 육바라밀이다.
*삼법은 곧 방편법을 말한다. 사제법은 성문승법을 말하고, 십이인연법은 연각승이며, 육바라밀은 보살승을 가리킨다. 법화경 비유품에서는 차례로 양의 수레, 사슴의 수레, 소의 수레로 비유했었다. 여기서는 샘과 못처럼 흐르지 못하는 것은 이승이라 했으므로 성문승 연각승이라고 할 수 있다. 강과 내는 통교를 가리킨다고 했고 시내는 별교를 가리킨다고 했으므로 보살승이며, 대해는 원교를 가리킨다고 했으므로 일불승이라고 할 수 있다.
“사과”란 첫째 수다원과로 신역으로는 예류과라고 부른다. 둘째는 사다함과 신역으로는 일래과라 하며, 셋째는 아나함과로 신역으로는 불환과라 하고, 넷째는 아라한과이니 신역으로는 이름이 같다.
①예류과(預流果:수다원須陀洹)란 욕계의 인간과 천상을 7왕래한다. 여기서는 삼결(三結: 견見․계금취견戒禁取見․의결疑結)을 끊은 자(견도의 마지막이고 수도의 시작)
②일래과(一來果:사다함斯陀含)란 세상에 한번 더 태어남. 삼결(三結)을 끊고, 삼독(三毒: 탐貪․진瞋․치痴)가 박약해짐.
③불환과(不還果: 아나함阿那含)란 세상에 오지않고 천상에 가 열반에 든다. 오하분결(五下分結: 신견身見․계견戒見․의疑․탐貪․진瞋․치痴)을 끊은 자.
④아라한(阿羅漢, 무학과)란 번뇌가 없어지고 심해탈 혜해탈을 얻은 자를 말한다.
“이도(二道)”란 첫째 방편도, 둘째 진실도이다.
“하나가 아니다”란 하지(下智)에서 관하면 삼도(三道)의 외범(外凡)·내범(內凡)·분성극성(分聖極聖)이 하나가 아니라는 것이다. 중지(中智)에서 관하면 삼도(三道)의 외범(外凡)·내범(內凡)·분성극성(分聖極聖)이 하나가 아니라는 것이다. 상지(上智)에서 관하면 삼도(三道)의 외범(外凡)·내범(內凡)·분성극성(分聖極聖)이 하나가 아니라는 것이다. 상상지(上上智)에서 관하면 삼도(三道)의 외범(外凡)·내범(內凡)·분성극성(分聖極聖)이 하나가 아니라는 것이다.
*내범 위범은 범부위 (凡夫位)에 있는 사람을 구별하여 내범 (內凡)과 외범 (外凡)이라 한다. 범 (凡)은 성 (聖)에 대비되는 것으로, 아직 불교의 교리를 증득하지 못한 사람을 말하고, 그 가운데서 약간의 지혜를 가진 사람을 내범이라 하고, 그렇지 못한 사람을 외범이라 한다. 이 중에서 외범(外凡)이란 견도(見道) 이전의 수행위(修行位). 소승불교에서는 오정심(五停心), 별상념처(別相念處), 총상념처(總相念處)를 이르고, 대승불교에서는 통교로는 초 간혜지(乾慧地)이고 오십이위로는 처음인 십신위(十信位)의 초분을 말한다.
내범(內凡)이란 불법의 진리 체득하지 못한 범부(凡夫) 가운데 진(眞)의 깨우침에 가까운 사람. 소승불교에서는 사선근위, 곧 난위·정위·인위·세제일위의 계위를 말하고, 대승불교에서는 통교로는 둘째 성지(性地)이고 오십이위로는 처음인 십신위(十信位)의 후분을 말한다.
오정심관(五停心觀)은 마음의 번뇌를 정지시키는 관법으로 다음의 다섯 가지가 있다.
①부정관(不淨觀, 백골관): 탐욕 색욕심이 많은 중생이 육체의 부정을 관하여 탐심을 쉬게 하는 것.
②자비관(慈悲觀): 진심이 많은 사람에게 불쌍히 여기고 사랑하는 마음을 낸다.
③인연관(因緣觀): 어리석음이 많은 자에게 십이연기를 관하여 우치심을 없앤다.
④수식관(數息觀): 산란한 마음이 출입하는 숨의 숫자를 쉬면서 마음을 수정하는 것.
⑤계분별관(界分別觀): 아집(我執)이 많은 자에게 인연화합임을 관하여 아견을 없앰.
사념처관(四念處觀)은 별상념주: 자상별관과 공상별관이 있다. 자상별관自相別觀은 신身·수受·심心·법法의 자상自相에 대하여 부정不淨·고苦·무상無常·무아無我라고 관하는 것. 공상념처관共相別觀은 일체의 법이 공통된 상으로 부정하고, 고통스럽고, 무상無常하고, 고苦라고 관하는 수행. 이를 총합하여 닦는 것을 총상념처관이라 한다.
사선근위(四善根位)란 사선근이 무루지無漏智를 증득하는 근본이라는 것. 그 증득하는 단계에 따라 다음의 네 계위가 있다.
①난위(煖位): 관혜觀慧로 시제四諦를 관하는 지혜.
②정위(頂位): 관혜의 사제를 관함이 정상에 도달함.
③인위(忍位): 사제의 이치를 인가認可(다시는 퇴타하지 않음)할 만함.
④제제일법(世第一法): 유루법중 가장 수승한 상태. 견도에 진입하는 무루지가 충만해짐. 이 다음에는 무루지로 번뇌를 끊어서 성인위에 들어간다.
*분성위란 원교 수행의 6즉(卽)으로 분진즉(分眞卽)을 말한다. 수행자가 1분씩 무명(無明)을 끊고, 1분씩 본래 갖추어 있는 불성을 증득하여 나타내는 자리. 원교(圓敎)의 10주(住)ㆍ10행(行)ㆍ10회향(廻向)ㆍ10지(地)ㆍ등각(登閣)ㆍ41위(位)를 말한다. 이 위는 41품(品)의 무명을 1품씩 끊어 들어가는 계위이다. 극성위란 육즉을 닦아 궁극으로 6종 성(性)의 맨 윗자리인 묘각(妙覺)의 지위에 이른 것을 말한다. 이 계위는 무명(無明)을 깨뜨려 없애고 증득한 극성으로 사실상 불과(佛果)의 위(位)라고 한다.
다른 경본에서는 하나가 아님을 이법 삼도 사과라고 한다. 이법이란 돈교의 법, 점교의 법이라 한다. 돈교는 화엄 돈교 중의 일체법을 말한다. 점교의 법이란 삼장·방등·반야의 일체법을 가리킨다. 삼도란 곧 삼승을 말한다. 사과란 아라한과·벽지불과·보살살과·불과의 넷이라고 한다. 또는 삼장불과·통교불과·별교불과·원교불과의 넷이라고도 한다. 비록 많은 해석이 있으나 능소能所를 벗어나지 못한다. 능히 한 법을 낳아서 무량한 법이 생겨서 열고 닫으니 비록 서로 다르지만 그 뜻에는 다르지 않다. 이법이란 사제 십이인연을 합하여 점이라 하고, 육바라밀을 돈이라 한다. 부部(교설)의 돈교는 화엄부를 말하고, 부의 점교는 삼장·방등·반야를 가리킨다. 삼도는 하지 상지까지 2관을 소승이라 하고, 상지의 관하는 도를 보살이라 한다. 방편의 일도를 열어서 일승이 되고 진실한 도는 근본을 지키고 이 삼을 더한다. 사과는 생긴 것이기 때문에 대승 소승에 통하고 이런 까닭에 서로 어긋나지 않는다.
[경] 선남자야, 물은 비록 다 씻을 수 있다 할지라도 그러나 샘은 못이 아니요, 못은 강하(江河)가 아니며, 시내는 바다가 아니니라. 여래 세웅(世雄)이 법에 자재함과 같이 설한 모든 법도 또한 이와 같음이라. 처음이나 중간이나 끝에 설함이 다 능히 중생의 번뇌를 씻어 제함이나, 처음은 중간이 아니요 중간은 끝이 아님이라. 처음이나 중간이나 끝에 설하되 말은 비록 같을 지라도 뜻은 각각 다름이 있느니라.
善男子,水雖俱洗,而井非池,池非江河,溪渠非海∘而如來世 雄於法自在,所說諸法亦復如是∘初 中 後說,皆能洗除衆生煩惱,而初非中,而中非後,初 中 後說,文辭雖一而義各異∘
[강의] 이 단락은 비유와 그 뜻을 합하여 밝혔다. 여러 가르침의 수승하고 열등함을 밝혓다. 샘과 못의 물은 다만 견혹 사혹을 씻어내고, 강하의 물은 견혹 사혹의 때와 침입한 습기를 씻어내는데 체를 절복하는 것이 다르고, 끊고 절복함이 또한 다르다. 시내의 물은 아직 감로미는 아니지만 사주四住의 내뇌內外의 때를 씻어낸다. 여기서 사주 내외의 때는 삼계 내와 삼계밖의 사주지혹을 가리킨다. 그 바다의 물은 짠 맛이 동일하여 능히 오주五住의 일체의 때를 씻어낸다. 오주의 때란 오주(五住)란 오주지혹(五住地惑)의 준말로서 견혹(見惑), 사혹(思惑), 무명(無明)의 번뇌를 다섯 가지로 가지고 나눈 것이다. 곧 욕애주지혹·색애주지혹·무색애주지혹·사혹·무명혹을 말한다.
“여래 세웅”이란 곧 부처님 자신을 가리킨다.
“법에 자재함과 같이 설한 모든 법도 이와 같다”란 등각 묘각의 계위에 오르면 팔자재를 갖추니 이런 까닭으로 법에 자재하다고 한다. 설한 법이란 유미의 화엄, 낙미의 아함, 생소미의 방등, 숙소미의 반야이다. 또한 이와 같다란 비유의 뜻을 합한 것을 말한다.
“음이나 중간이나 끝에 설함이 다 능히 중생의 번뇌를 씻어 제함이나”란 계내의 번뇌를 모두 없애는 것을 말한다. 사제는 간략하여 십이연기과 다르므로 처음은 중간이 아니라고 하였고, 연기법은 광대하여 또한 자리自利여서 육바라밀과 다르니 그러므로 중간은 끝과 다르다고 하였다. 본래 공적하지만 념념이 생멸하여 그 경문이 비록 하나이지만 안팎으로 다르고 성상性相이 각기 다르니 이런 까닭으로 경문에서 “말은 비록 같을 지라도 뜻은 각각 다름이 있다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