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장 후진 요흥(姚興)의 서방 경영정책과 라집법사의 장안 입성
1. 요장(姚萇)의 후진(後秦)건국
감숙성의 농서현(隴西縣)의 적형 출신 강족대증장(羌族大曾長) 요과중(姚戈仲 280〜352)의 아들 요장(姚萇 330〜393)은 현서성 장간 가까운 마목(馬牧)에서 384년 4월 4일, 나라를 세웠다. 이보다 앞서 그의 형 요양(姚襄 316〜358)은 전진의 부견과 다투다가 385년 죽음을 당하였다. 하지만 요장은 마음을 바꾸어 대중을 이끌고 부견에 귀의하여 중용되었다. 그런데 383년 11월, 부견이 비수(淝水)의 전투에서 패하자 화북의 정세는 하루아침에 돌변해서, 바야흐로 요장은 자립의 가을을 맞이하게 되었다.
다음 해 4월, 부견의 명(命)에 의해서 요장은 모용홍(慕容泓) 토벌에 나섰다. 그러나 요장이 이 전투에서 패하자 그 처벌을 면하겠다는 명목으로, 마음을 바꾸어 반기를 들고 마목에서 거병(擧兵)한 것이다.
요장은 곧 전진의 수도 장안으로 향하려고 했다. 그러나 당시 아래쪽에는 아직도 모용홍과 그의 아우 모용충(慕容沖, 359〜386, 재위 385〜386)이 서연(西燕)을 세워 장안에 있던 부견과 치열한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그래서 요장은 장안을 피하여 협서 북부에서 감숙성의 경수(涇水)와 위수(渭水) 일대를 차지하였다. 그리고 지방에는 모용충에게 볼모로 아들을 보내어 이들과는 동맹을 맺었다.
384년 모용충은 장안을 공략했다. 이에 맞서 부견이 몸소 전쟁을 독려했지만, 결국 성이 함락되었다. 모용충의 공격을 이겨내지 못한 부견은 385년 5월, 마침내 장안을 탈출하여 오장산(현서성 기산현)으로 도망치고 말았다. 이를 안 요장의 군대가 8월 부견을 추격하여 붙잡게 되자, 부견은 스스로 목숨을 끊게 되었다.(요장에게 살해당했다고도 함) 이때 부견의 나이는 48세였다.
장안에는 새로이 모용충이 입성하여 서연의 주인이 되었다. 그러나 성안 사정은 아주 악화되었다. 전쟁에 승리한 모용충은 군인들이 악행과 노략질하는 것을 허락했다. 이로 인해 점령군은 민심을 잃고 백성들은 뿔뿔이 흩어져서 거리에 인적마저 끊어지게 되었다. 성안의 촌락마다 굶주리고 기근이 들어 천리에 연기가 없었다고 {진기}에는 기록하고 있다. 이로 인해 병사들도 거의 굶어 죽을 지경이 되었다. 모용충의 부하들은 자신들의 본거지를 떠나 이곳에 오래 머무르는 것을 반대하였다. 마침내 386년 2월, 장안에 머무르려고 하는 왕을 살해했다. 그리고 왕의 일족이었던 모용영(慕容永 ?〜394)을 세우고 장안을 떠나 동쪽으로 돌아갔다.
이런 상황에서 요장은 텅 빈 장안에 손쉽게 들어올 수 있었다. 같은 해 4월, 황제 위(位)에 올랐다. 그는 장안을 상안(常安)이라 고치고 나라의 수도로 삼았으며, 국호를 대진(大秦, 後秦)이라 했다. 여기서 장안을 상안이라 고친 것은 어쩌면 국왕 요장의 이름 휘(諱)가 같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여기서부터 장안은 후진의 도읍으로서 32년간 번영을 계속할 수 있었다. 후진을 건국하고 이와 같이 강대한 나라로 만든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무엇보다도 요장이 부장(部將)으로서 재량(才量)을 지니고 있었고, 탁월한 전술을 쓸 줄 알았으며, 군단의 군영에서 사용하는 영(營)을 조직하여 적용했다는 것이다.
{진서} 요장의 기록에는 “영이 있는 한 구역마다 나무 하나를 심어 놓아서 전공(戰功)을 드날렸다”라고 한다. 같은 책 요흥의 기록에는 “마음에 두고 있던 삼만호를 장안으로 이주시키고, 대(군)영의 집들을 네 구역으로 나누어서 여기에 사군을 두어 이끌도록 했다”라 한다. 또한 당초의 사신은 “나무를 열 지어 심어서 새로운 진영을 나타내는 경계를 나타냈다고 전한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군단에 있는 군영의 영의 구성을 자세히 알 수는 없으나 군영에서의 영은 7천에서 1만인 정도로 구성하고 그 장은 무위(武衛)라고 한 것 같다({진서} 요흥의 기록). 진영을 나타내는 울타리에는 전공(戰功)을 나무를 심어서 나타냈다고 한다.
이 진영을 이룬 집들을 영호(營戶)라고 불렀다. 그러나 이 영호들이 진나라에서 처음 독자적으로 만든 제도는 아니었다. 이미 전연(337〜370)에서 이를 설치했던 적이 있다고 한다( 谷川 앞의 책, p.88). 이것은 군현제와 달리 군대조직을 기반으로 하는 자치체제였는데, 후진은 이것을 전연에서 배워와 적용한 것으로 보인다. 후에 북위에서 이를 계승하여 토지제도에 적용했다고 한다.
그런데 후진의 정치에 대해서 요장은 천수(天水 감숙성 천수현)의 한인 호족 윤위(尹緯)를 발탁해서 맡겼다. 이것은 한인 호족을 위무하고 그 지지를 얻어 덕의 정치를 펴려는 것이었다. 윤위는 자살하기 직전 부견으로부터 “너는 재상의 재목으로 왕경략(王景略)과 같이 될 것이다. 그런데 짐은 언제일지는 알 수 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