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후진 요흥(姚興)의 불교에 대한 태도.
국왕 요흥은 유교를 제일로 신봉했으나, 불교에도 깊은 이해를 보여주고 받들어 지녔다. 이미 부왕 요장은 홍각법사(弘覺法師)를 맞아들여 축법호 역{정법화경}의 강의를 청해들었다는 내용이 {고승전} 담제전에 나타난다. 또한 황태자였을 때 요흥도 홍각법사의 제자 승략(僧䂮)에게 깊이 귀의했다고 한다({고승전} 승략전). 국왕이 되어서 요흥은 승략을 초청해서 전폭적인 신뢰를 보냈다. 그후 후진의 불교교단 통치자인 국내승단의 승주에 임명했다. 이에 대해서는 뒤에 진술한다.
라집 외에도 외국에서 온 사문 담마유지(曇摩流支) ․ 불타야사(佛陀耶舍) 등을 후대했다. 또 국내의 담영(曇影) ․ 승조(僧肇) ․ 승도(僧導) 등의 고승들에게 귀의했다고 한다. 이들은 라집법사의 스승이거나 제자들로, 아무래도 라집법사와는 깊은 연관이 있는 승려들이다. 불교에 대한 요흥의 이해는 {광홍명집} 제18권(대정장 52, p.228)에 수록되어 있어 그 대강을 엿 볼 수 있다.
요흥이 쓴 {여안성후요숭의술불서(與安成侯姚嵩義述佛書)}에는 안성후 요숭에게 대승의 여러 가지 뜻을 물으면서 라집법사에게 자문받았다고 하고 있다. {통삼세론(通三世論)}에도 여러 법사에게 삼세에 대해 묻고, 자신은 삼세일통 순환의 작용을 주장했다. {집법사답(什法師答)}에서는 라집법사가 요흥의 설(說)에 대해 고상한 논에 크게 통하여 매우 아름답다고 칭송했다고 쓰고 있다. 사실 그가 서술한 삼세론은 인과응보라고 하는 소박한 내용을 벗어나 대승 공관에 관한 내용이다. 설하는 방광신통 변화설은 반야경의 공(空) 정신에 기초한 설명이라고 한다.
(횡초혜일, {涅槃無名論과 그 배경})
이들 저술은 라집의 초청 이후, 라집의 교시에 의해서였다는 것이 나타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요흥의 불교학 이해는 상당히 높았다고 할 수 있다. 역시 {고승전} 승략전에는 그의 불교 숭신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요흥은 이미 삼보를 숭신해서 널리 교화를 폈다. 법회를 열어 재회를 시설하여 향연기가 타오르게 연개(烟蓋)를 만들었으며, 무릇 불도를 사모해 속세를 버리는 자가 열 가운데 그 반이나 되었다.”
이렇게 국내에서 많은 불교신자들이 배출되었다. 또{진서} 요흥 재기(載記)에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요흥은 이미 뜻을 불도에 의탁했고 공경대부 이하들 중에서도 공경해서 의탁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먼 곳에서 들어오는 사문만도 오천여 인이나 되었다. 부도(불탑)를 영귀리(永貴里)에 세우고 파야대(波若臺)를 중궁(中宮)에 건립했다. 좌선을 닦는 사문들은 항상 수천이나 되었다. 주와 군에 이를 펴서 부처님을 섬기는 집들이 열 가운데 아홉 집이나 되었다.”
남쪽 지방 여산에 있던 혜원(慧遠)은 요흥의 봉불신행을 보고 칭송했다. 혜원의 {대지도론초서}에 의하면, “그때 진나라 주군인 요흥왕은 대법을 공경하고 좋아해서 이름난 학자들을 초청해 모아서 이들로 하여금 삼보를 융성하도록 했다. 그의 덕은 습속(習俗)이 다른 곳에도 흡족히 적셔 주었다. 교화는 서역에 까지 흘러들었다.”({출삼장기집} 제10) 라고 하였다.
요흥의 불교 귀의는 국내와 남조뿐만 아니라 멀리 서역에도 전해져 있다. 그런데 요흥의 고원(高遠)한 불교적 교양과 귀의와 다른 내용의 사료도 있다. 좀 후대에 이르러 송(宋)의 송민구가 저술했던 {장안지} 제 5권에는 소요원(逍遙園) 할주에 다음과 같은 내용을 소개하고 있다.
“요흥은 항상 소요원에 여러 승려들을 데리고 와서 번승(番僧) 구마라집의 불경에 관한 강연을 경청하도록 했다. 전각이 있는 마당 좌우에는 누각이 있었다. 높이가 백 척(약 30m), 넓이가 40장(약 120m)이나 되었다. 마로 꼬아 만든 끈의 크기는 일위(一圍)로 양쪽 끝을 가지고 각각 누각의 위에 이었다. 법회일에는 두 사람을 각각 누각 안에서 나와서 끈 위를 지나가도록 해서 신과 부처님이 서로 만나도록 했다.”
좌우의 탑은 부처님의 탑신의 탑을 두고, 이 탑에 줄을 걸어 갖가지 모습으로 부처님과 신의 장식을 한 두 사람이 각각 탑 위에서 줄을 타고 건너와 신과 부처님이 서로 만나도록 하여 이를 보고 기뻐했다는 내용이 보인다. 이것이 비록 국왕 요흥의 발의로 행해졌다 하더라도, 이 시대 호족(胡族) 국가의 민중의 신과 부처님이 서로 이해하고 있다는 내용을 엿볼 수 있다. 호족의 민중들 일반에 널리 이와 같은 풍습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또, 같은 {장안지} 제 5권에 파야대(波若臺) 할주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도 보인다.
“요흥은 사문 5천여 인을 모았다. 육도(六道)에 있는 자는 50인이다. 부도를 영귀리에 일 으켜 세우고 파야대를 세워 그 속에 수미산을 지었다. 사면에는 숭상하는 바위, 험준한 절벽, 진귀한 짐승, 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