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반야경류와 {대지도론} 번역(전편에 이어)
 장안에서는 앞에서 밝힌 바와 같이 도안(道安)이 선관(禪觀) 실천의 중요한 요지를 해석하여 모으고, 경전으로 반야경에 특히 주목해서 정확을 기해서 연구 강의에 정열을 기울였다. 도안은 그때까지 있었던 소품반야경의 하나인 {도행경(道行經)}을 주해하기에 되었고, 여기에 대품에 있는 {방광경(放光經)}을 참조해서 대조하고({도행경서}), 다시 같은 대품의 동본 이역異譯인 {방광경}과 {광찬경(光讚經)}을 대비해서([合放光讚隨略解]) 역문 ․ 역어의 차이에 주목했다. 당시 장안에 있어서 반야경 연구는 뛰어난 학문적 수준을 보여주었다.(자세한 내용은 횡초혜일저 {中國佛敎の硏究} 제1장에 서술하고 있다.) 이후 장안의 불교계는 {대품반야경}의 완성을 고대하였다. 라집은 {대품반야경}의 번역에 앞서 {대지도론}의 번역을 완성하였다. 반야경의 주석서인 {대지도론}을 들어서 해석하고 강설하는 것은 장안 불교계의 오랜 바램에 부응하는 일이 되었다. 당시의 모습을 {대지도론기}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라집은 홍시 4년(402) 여름, 소요원에 있는 서문각(서명각의 오자誤字)에 있으면서 요천왕(요흥)을 위해 {석론}을 역출했다. 그리고 7년 12월 27일에 마침내 끝마쳤다. 그 속에서 겸하여 경본(經本) ․ 선경(禪經) ․ 계율(戒律) ․ 백론(百論) ․ 선법요해(禪法要解)를 역출하여 오십만 언에 이르렀다. 아울러 이 {석론}은 일백오십만 언이나 되었다. 논의 초품은 34권으로 1품을 해석했는데, 이것은 전체를 논하여 근본을 갖춘 것이다. 2품 이하는 법사가 간략하게 생략하여 그 요점만을 취했으니 문장의 뜻을 열어서 해석하는 데 족할 뿐이다. 다시 자세한 해석은 갖추지 않고 이백 권을 얻었다. 만약 다 이것을 역출했다면 이것보다 10배에 달했을 것이다.({출삼장기집} 제10권)

이 번역에 주목해야만 하는 것은 승예의 {대지석론서}에 “왕은 방울달린 수레를 물가에 멍에를 채워서 서 있게 하고, 금원(禁園)을 호위하는 경비는 숲속에서 쉬게 하고 몸소 현장을 열람했다”고 하여, 요흥 스스로 역장에 참여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중국 황제로 불리면서 역장에 참여했던 최초의 사람이다. 그는 5백여 인의 승려 ․ 귀족을 초청하여 여기에 모이도록 했다고 한다.
 이 {대지도론}의 번역에 있어서 라집이 삭제했다는 내용에 대해서 알아보기로 한다. 앞의 {대지론기}에 의하면, “만약 다 이것을 역출했다면 이것보다 10배에 달했을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원본이 역출譯出한 것보다 10배 정도일 것임을 전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혜원(慧遠)의 {대지론초서}에서는 “이 논論이 깊고 넓어서 자세히 연구하기 어렵고 방언은 생략하기 쉽기 때문에 근본을 요약하여 100권으로 만들었다. 누락된 것을 계산한다면 거의 3배를 넘는다.”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승예의 {대지석론서}에는 “호어와 중국말은 서로 다르고 또 번쇄하고 간략한 차이가 있어 3분의 2를 제외시켜 2백 권을 만들었다.”라 하면서, 또한 “만약 갖추어 그 경문을 번역했다면 대략 천여 권에 가까울 것이다.”라 하는 등, {대지도론} 원전의 번역한 양에 대해서 차이가 나타나고 있다.
여기에 대해서는 혹은 원본에 충실히 그대로 번역하면 현 역출의 3배가 될 것이나 실제로는 번역할 때 라집이 설명을 붙여가면서 번역해 갔기 때문에 만약 설명을 붙여서 전문을 완역한다면 원본의 10배에 달했을 것이라는 의미일 것이라고 해석하기도 한다.(횡초혜일, {中國佛敎の硏究} 제2 구마라집의 번역). 어쨌든 {대지도론}의 원본이 방대한 분량이었다는 것만은 확실해 보인다. 여기에 대해서 라집은 자신의 재량에 의하여 과감히 삭제했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은 “진나라 사람들(중국인)이 간략한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대지석론서})라든가, “이 논論은 깊고 넓어서 끝까지 정밀히 연구하기 어려워서”({대지론초서})라고 하고 있다. 곧 중국인들은 간결함을 좋아한다는 것과, 또한 이것이 이해를 용이하게 하도록 삭제를 빈번히 행하여 뜻에 통하는 번역을 했다고 말하고 있다.
 이와 같이 간결하고 뜻이 통하는 번역문을 라집이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여기에 협력한 뛰어난 중국인 승려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또한 라집이 이들 원전과 그 뜻을 암송하고 숙지했다는 것도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중론}과 {백론}을 소륵 등에서 암송했다는 것은 앞에서 말한 바 있다. 암송할 정도로 숙지했던 불전이라면 이것을 번역할 때, 간결하고 뜻이 통하는 역문을 역출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라집의 학식과 견식(見識), 여기에 그의 성격을 더해서 대담한 삭제와 적지 않은 부가(附加)가 이루어져서 오늘날 우리가 보는 {대지도론}이 되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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