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 기독교의 형성과 로마제국
민 희 식
기독교의 초기의 포교 활동은 세계 각지에 있는 유태인 사회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거기서 <교회>라고 불리는 신도의 공동체가 태어났다. 예루살렘이 그 중심지가 되고
초기의 지도자들은 실제로 예수의 가르침을 들은 자이다.
교회의 공통적 유대는 세례와 성찬의 의식이었다. 기원 70년에 로마가 예루살렘을
약탈하자 유대교들뿐 아니라 기독교도들도 흩어지게 되었다. 2세기 초에 이르기까지
유대인 조직은 강해졌고, 그것은 기독교 교회의 사교, 장로, 조사제(助祭)의 3계급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그들은 교회의 관리나 운영만을 담당하였다.
기원 73년의 마사다 요새지의 함락과 유태인의 분산에 대해선 유태인 역사가인
요세프가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그 후 로마에선 유태인들에 대해 종교 지도자가
공인되었고, 과격한 민족주의자를 제하고는 유태인은 로마 제국에서 편안하게
살 수 있게 되었다. 또한 그들의 종교도 허용되었다.
처음엔 로마 당국은 기독교를 유태인이 믿는 일신교(一神敎)의 일파로 간주하였다.
예수의 처형, 스테파노의 순교, 바울의 전도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처음에
기독교를 박해한 것은 로마인이 아니고 유태인이었다.
네로황제 때 유태인이 기독교인을 악인으로 몰았기 때문에
처참한 살해가 일어난 것이다.
기독교도가 위험분자, 테러리스트로 등장하게 된 것은 2세기 초이다.
그 이유는 기독교인이 로마의 황제나 신들에게 공물을 바치고 예배하는
로마의 제사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로마인은 유태인에 대해선 그들이 민족 종교의
전통을 지키는 것을 허가했으나 기독교인에게는 그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로마의 신에 대한 공식적 예배를 요구하였으나 기독교인이 거부하자 이를 벌하기
위해 기독교인에 대한 학살이 시작된 것이다.
기독교도들에 대해선 로마 정부보다 로마 민중이 더 무서웠다.
왜냐하면, 로마에서의 기근, 전염병, 홍수 등 천재(天災)가 일어날 때마다
신의 노여움에 의한 것이라 생각하고 그 노여움의 죄를 기독교인에게 돌렸기 때문이었다.
특히, 기독교인의 밤의 집회나 인간 평등에 대한 가르침은 로마의 사회 질서를
무너뜨린다고 생각했다.
당시는 기독교 일파인 그노시스주의가 세력을 뻗치고 있었는데, 그 사상은
불교를 중심으로 한 조로아스터교, 힌두교가 바탕을 이루었다. 여기에 기독교는
심각한 딜레마에 빠지게 되었다. 기독교가 유태교의 테두리에 계속 머물면 유태교의
전통 속에 흡수되어 사라질 우려가 있었다. 반면 유태교에서 벗어나 그노시스에
빠지게 되면 그 바탕인 불교 사상에 휩쓸리게 될 우려가 있었던 것이다.
기독교는 유태교로 가느냐, 그노시스화 되느냐의 기로에 서게 되었다.
이 위기를 벗어나게 하는데 큰 역할을 한 사람들이 바로 교부(敎父)들 이었다.
기독교들을 처음으로 박해한 황제는 네로(AD54-68)였지만, 그 후 박해는 더 심해졌다.
로마 원형 경기장(AD80년 완공) 에선 기독교인들을 잡아와 서로 싸워 죽이게 하고
황제나 고관들이 그것을 즐겨 구경했다. 그로인해 많은 순교자가 나오게 되었다.
로마의 신앙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그 이유이다.
기독교 초기부터 313년 밀라노 칙령으로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기독교를
공인할 때까지의 교황의 역사는 이 못지않게 비참했다.
기독교의 토대는 예수의 탄생, 생애, 죽음, 그리고 부활이다.
고대 종교에도 신이 인간으로 태어나 살다 죽는 이야기는 허다하지만 죽은 지 3일 만에
부활했다고 주장하는 종교는 기독교뿐이다.
이상하게도 그 기적적인 부활에 대한 네 복음서의 기술은 일치하지 않는다.
누가에 의하면 <예수가 사도들 앞에 나타나자 그들은 그를 유령인 줄 알고 물러섰다.
그러나 예수가 구운 물고기를 먹는 것을 보고 믿게 되었다.
토마스는 자기 손으로 상처를 만져 보고야 그것을 믿었다. 마가는 예수가 이상한
모습을 하고 두 순례자 앞에 나타나 서로 말을 나누고 저녁 식사에 초대함으로써
예수임을 알게 되었다고 했으며 예수는 그 후 바로 사라졌다>고 하였다.
요한에 의하면 예수의 무덤 앞에서 슬퍼하는 막달라 마리아 옆에 한 남자가
서 잇는 것을 보고 묘지지기로 생각했으나 마리아가 이름을 부르는 것을 보고
예수임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사실 예수의 생애, 죽음, 부활에 대한 의견은
초기 기독교가 공인될 때까지의 기독교도와 교황들의 생애는 너무 비참하지만
여기에 그때까지의 교황의 역사를 살펴보기로 한다.
처음 사도들은 예수가 후계자로 지명한 베드로를 지도자로 선발하였다.
베드로는 기원 30년 예수가 죽은 후 기원 67년에 로마에서 처형당했으며,
그때 자기의 노예 리누스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