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루자(金樓子}에는 두 사람의 극적인 만남을 기록하고 있다. 어느 날 습착지가 도안을 방문했을 때 도안은 재당(齋堂)에서 대중과 함께 식사를 하고 있었다. 습착지가 들어오자 대중들이 바루를 놓고 모두 일어나 그에게 예를 표했다. 그러나 오직 도안만은 예를 표하지도 식사를 멈추지도 않았다. 이에 습착지는 화난 어투로 “사해의 습착지가 일부러 그대를 만나러 이곳에 왔소.”라고 했다. 이에 대해 도안은 “미천의 석도안은 바빠서 당신을 만날 겨를이 없습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사해의 습착지라고 다소 거만한 말을 던진 그에게 분위길 한 번에 전환시켜 탄성을 자아내게 한 도안의 인품과 기개는 정말로 대단하다고 할 수 있다.
부견은 도안에게 사자使者를 보내 외국에서 가져온 기묘한 불상, 금으로 된 좌불상, 보주가 달린 미륵상, 금색 실로 수놓은 상, 실로 짜서 만든 상을 보냈다({고승전} 석도안전). 도안도 이 불상들을 모시고 법화를 했는데 사람들이 참배하려고 불상 앞에 이르면 금빛이 찬란해서 눈이 부실 정도였다고 한다. 곧 부견이 얼마나 도안을 존경했는지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건원 15년(379) 부견은 마침내 도안을 모셔오기로 결심을 굳혔다. {고승전}에는 “양양에 도안 스님이 있는데 그 분은 신묘한 법기이다. 그를 데려다가 짐을 보필하도록 해야겠다”라고 선언하고, 부비(符丕)를 파견하여 양양을 공격하게 했다.
도안은 화북 상산(常山, 화북성 正定현)에서 태어났다. 어린 사미시절에는 용모가 못생겨 스승으로부터 사랑받지 못했다. 스승은 그에게 3년간이나 농사일을 시켰다. 그러나 그는 조금도 원망함이 없이 묵묵히 농사일을 했다. 어느 날 스승에게 불경을 요청하니 스승이 오천여 자字로 된 {변의경}을 주었다. 오후가 되자 도안은 그 경을 스승에게 반납하고 다른 경을 요청했다. 스승이 그 이유를 물으니, “벌써 다 외웠다”고 했다. 그 후 스승도 그의 능력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도안은 이 스승으로부터 구족계를 받았다고 하는데 그 이름은 알려져 있지 않다.
그 후 호족의 침입으로 진산(晋山)에 숨어 살았는데, 이때 태양의 축법제(法濟), 병주의 지담강(支曇講) 등이 찾아와 같이 지냈다. 이때 지담이 {음지입경}을 강의하고 같이 연구하여 이 경의 주해(注解)를 저술했다.
도안의 나이 25~6세 때 불도징(佛図澄 232~348)을 만났다. 이 때 불도징은 구자국에서 와서 성 안의 중사(中寺)에 머무르고 있었다. 이때가 335년 그의 나이가 104세였다고 한다. 불도징은 도안을 보자 대중들에게 말하기를, “이 사람의 높은 식견은 너희들이 감히 미칠 바가 못 된다”고 도안의 비범함을 찬탄했다. 도안은 불도징으로부터 사사하고 깊이 경론을 연구했다. 특히 계율을 배우고 불전을 익혔다. 어느 날 도안은 불도징의 강의를 반복하게 됐는데 이를 시기한 대중들이 “저 거무퇴퇴한  도안이란 자와 논쟁을 벌려 꼼짝 못하게 해야겠다.”고 모의했다. 그리고 어느 날 도안에게 어려운 질문공세를 폈으나, 도안은 이들의 질문에 모두 답했고 오히려 여력이 남았다. 그래서 사람들이 “칠칠한 듯한 새까만 도인[漆道人]이 사부대중을 놀라게 했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여기서부터 도안은 본격적으로 불교학자로 성장했다.
도안이 불도징을 언제 떠나왔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불도징이 입적한 348년 이전에 업(鄴)을 떠났을 것이다. 이후 그는 험준한 태행산맥 속에 숨어살면서 교화를 편 것으로 보인다. {고승전}에도 “도안스님이 나중에 태행의 항산에서 사탑을 건립하자, 옷을 바꿔 입고 교화에 따른 자들이 하북을 절반으로 나누었다.”고 하여 하북에까지 그의 교화가 미쳤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때 교단은 동료와 제자들 400여 명 정도의 교단으로 성장했다. 축법태(320~387)는 그의 동학同學의 한 사람이다. 354년 혜원(廬山慧遠)이 21세의 나이에 문하로 들어 왔고, 혜지(慧持)가 18세의 나이로 문하에 들어 왔다.
마침내 도안은 50세 쯤 수백 명의 제자를 데리고 양양에 나오게 되었다. 도안은 처음에는 백마사에 머물렀으나 장소가 좁아서 새로이 절을 지었는데, 이곳이 단계사(檀溪寺)였다. 이 절은 단계수라는 하천 언덕에 세워졌다고 한다. 당시 이름난 부호들이 시주하여 5층탑과 400개의 승방을 갖춘 대 가람이었다.
특히 단계사에는 유명한 불상이 있었다. 이 불상은 도안의 나이 62~64세쯤인 동진 영강 연간에 만들어졌다고 한다. 도안은 이 불상을 조성하기 위해 대원을 세웠는데 원이 이루어지자, “저녁에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할 만큼 기뻐했다고 한다. 여러 전적에는 이 석가상에 대한 흥미 있는 기록들이 실려 있다.
{고승전}에는 이 불상이 스스로 양양 교외의 만산읍(萬山邑)에 나타나곤 했다. 그래서 그 마을 사람들은 석가상에 예배드리고 다시 절로 모셨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