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landa를 통해 본 인도와 한국불교의 교류(학술대회 발표요지)***********
고대 세계 불교학의 중심지로서 Nalanda는 한국 고대불교계에는 어떠한 영향을 주고받았을까. 이러한 구체적인 연구의 성과는 아직 나오지 않았었다. 이 연구는 Nalanda를 중심으로 펼쳐진 한국과 인도불교의 교섭관계를 밝히는 기초 작업이라 할 수 있다.
그 첫 단계로 먼저, 한국 불교문화에서 인도불교가 어떻게 수용되었는지 고찰해 보고자 한다. 불교문화 수용여부는 불교학의 발전에 중요한 토대가 되기 때문이다. 다음은 인도와 한국의 고승들의 교류를 밝히고, 인도의 Nalanda를 중심으로 어떠한 교섭이 이루어졌는지 알아본다. 여기서는 먼저 인도에 구법을 떠난 한국의 고승들과 인도에서 도래한 고승들을 알아보고, 다음으로는 Nalanda에 갔던 한국고승들과 Nalanda에서 수학하고 한국에 와 교화를 편 고승들의 행적을 알아보고자 한다. 이로써 Nalanda를 통해 이루어진 과거 인도불교와 한국불교의 교섭관계를 조명하고, 이를 검토하여 Nalanda의 위대한 정신을 더욱 계승 발전시키는 계기로 삼고자 한다.
한국의 불교문화 속에 나타난 인도불교의 가장 많은 내용은 Aśoka(아쇼카)왕의 불교업적이 반영된 설화들이었다. Aśoka(아쇼카)왕의 불탑 건립설화나 진흥왕의 장육존상 조성설화, 문무왕의 불교정책 등은 세계적인 호불왕 Aśoka(아쇼카)왕의 업적을 모델로 삼아서 인도의 불교를 적극적으로 수용하고자 했던 한국인들의 마음을 반영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여기서 나아가 비록 인도에서 부처님이 출현하셨지만 한국이 인도 못지않게 불교와 인연이 깊다고 생각하기에 이른다. 그래서 신라왕족은 Śakya(석가)족과 같은 종족으로 일체시하여 왕들의 이름을 Śākyamuni(석가모니)가족에서 차용하고 있고, 지명과 사물에도 인도의 부처님 유적과 불교사와 연관시켜 적용하였다.
이러한 인도불교의 수용 자세는 인도의 고승들이 왔을 때 적극적으로 불교를 받아들였다. 그 예로 마라난타가 중국을 거쳐 처음 백제에 왔을 때 왕과 백성들은 경사로 여겨 유통시켰으며, 이듬해 한산에 절을 지어 10명을 한꺼번에 배출시킨 사실에서 잘 나타난다. 또 불교를 수용한 이후부터는 끊임없이 많은 구법승들이 중국을 거쳐 인도로 갔다. 인도까지의 여행에 많은 난관이 있었지만 6세기 이후 한국의 고승들은 인도에 가서 불교학을 전수해왔다. 이러한 교섭 속에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발견은 한국과 인도불교의 교섭의 구심점이 Nalanda였다는 사실이다. Hiuen Tsang의 서역답사기에 등장하는 아리야발마 혜업, 혜륜, 현각 등의 한국고승들이 인도에 간 목적지가 Nalanda였고, 한국에서 큰 활약을 한 지공 또한 Nalanda로부터 와서 불법을 전해주었기 때문이다.    
특히 13세기 Nalanda로부터 중국을 거쳐 고려에 온 108조 지공은 고려 불교사에 큰 자취를 남겼다. 고려에서는 부처님의 나라에서 온 지공을 마치 석가세존이 다시 태어나 먼 곳을 거쳐 이곳에 왔다고 그를 환영해 맞았다. 그리고 백성부터 왕에 이르기까지 큰 스승으로 모시고 그의 가르침을 경청했다. 지공은 날란다에서 익힌 불교학을 베풀어주었고, 고려에서는 회암사를 지어 한국의 Nalanda로 삼았다. 지공은 회암사의 지세가 인도 날란다와 같다고 하면서 나옹에게 이곳에 창건하게 했다고 한다. 더욱이 그가 입적한 뒤 그의 유골은 한국의 회암사에 있는 부도탑에 모셔져 한국인들과 함께 숨쉬고 있다.
이와 같이 한국과 인도의 불교 문명 교섭관계를 조명해 볼 때, 이는 한국과 인도의 불교 교류에 좋은 모델이 될 것임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지금의 Nalanda가 다시 복원되어 옛날과 같은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면, 이는 세계불교 문화사를 복원하는 일이 될 뿐 아니라, 한국 인도의 불교문화사를 복원하는 중요한 사건이 될 것이다. ****<이상 발표요지>*****
  

4) 불교문화의 중심 날란다대학

이번 인도 학술대회 중에 날란다 방문 역시 나를 설레게 하는 곳이었다. 그곳은 세계 최초의 대학일 뿐 아니라, 당시 최대 규모의 대학에 최고의 지성들이 불법을 연마하던 곳으로, 불교의 전통과 역사가 배어 있는 불교정신의 메카였기 때문에 꼭 내 눈으로 그 역사의 현장을 보고 싶었었다.
날란다 유적은 왕사성에서 북쪽으로 30여리 떨어진 곳이다. 원래는 인도 최고의 호불왕인 아쇼카왕 때 나란타사가 세워졌는데, 여기로부터 대학으로 발전했다고 한다. 현장스님이 이곳에 왔을 때(631년)에는 이미 동양 최대의 종합대학으로 성장하여 있었다. 당시 이곳에는 4000명의 승려가 상주하고, 교수와 학생 수가 만 명을 헤아리는 인원이 있었는데도 의식衣食이 전혀 궁핍하지 않았다고 한다. 현재 이곳 유적지 크기가 폭이 5km, 길이 10km에 달하는데, 아직 모두 다 발굴하지 못하였다고 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