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첨] 다음으로 화타를 융통시킨 것 중에 둘이 있다. 곧 *범행은 화타의 근본이요, 병행과 영아행은 화타의 양상이라 함이니, 또한 *체용(体用)의 관계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삼행(三行)은, 초지에 이를 때에는 똑같이 초지의 화타의 체용을 이루는 것이다.

次融化他中二. 梵行是化他根本, 病兒是化他之相. 亦是體用. 故此三行, 至初地時, 同成初地化他體用也.

12134범행은 화타의 근본임. 원문은 ‘梵行是化他根本’. 지전(地前)에서 볼 때는, 범행은 화타의 수행이며, 병행․영아행은 그 수행이 성취된 경지에서 베푸는 교화방법이 되고, 가능하다. 그러므로 지전에서는 한, 이 삼행(三行)은 뚜렷하게 구별된다. 그러나 초지에 들어가면 삼행은 원융하여 하나의 중도에 붙여진 이름인 것이 된다는 취지다.
12135체용. 본체와 작용.

 [석첨] 셋째로 ‘佛地’ 아래서는 경계하여 권했다.

三佛地下, 誡勸.

 [석첨] ‘*불지(佛地)의 공덕은 우러러 믿을 따름이니, 어찌 *암심(闇心)을 가지고 꼭 분별해야만 되겠는가. 간략히 대답함이 이와 같다…….’

佛地功德, 仰信而已. 豈可闇心, 定分別耶. 略答如此云云.

12136불지. 부처님의 경지.
12137암심. 의혹(疑惑)의 마음.

 법화현의 권四 하(下)

 [석첨] 다음으로 원교(圓敎)의 오행(五行)을 밝힌 것 중에 둘이 있으니, 처음에서는 가르침에 입각해 밝히고, 다음에서는 *관심(觀心)에 입각해 밝혔다.
 처음의 글에 또 넷이 있으니, 처음에서는 경을 인용하여 행을 세우고, 다음으로 ‘此大’ 아래서는 인과를 판별하고, 셋째로 ‘擧此’ 아래서는 편교적(偏敎的)인 것을 물리치고, 넷째로 ‘若圓行’ 아래서는 원교의 행을 밝혔다.

次明圓五行中二. 初約敎. 次觀心. 初文又四. 初引經立行. 次此大下, 判因果. 三擧此下, 斥偏. 四若圓行下, 正明圓行.

12138관심. 2214의 주.

 [석첨] 원교의 오행(五行)에 관해 살피건대, *대경(大經)에서는
 ‘*다시 하나의 행(行)이 있으니 여래의 행이다. 소위 대승의 *대발열반(大般涅槃)이다.’
라 하셨다. 이것에서 ‘*대승’은 원교의 인(因)이며, ‘열반’은 원교의 과(果)다.

圓五行者. 大經云. 復有一行, 是如來行. 所謂大乘大般涅槃. 此大乘是圓因, 涅槃是圓果.

12139다시 하나의 행이 있으니 여래행이다. 원문은 ‘復有一行, 是如來行’. 오행(五行)외에 다시 여래행을 세움으로써 원교의 행을 보인 것. 원교에서 볼 때는 진리는 본래부터 우리에게 갖추어져 있는 터이므로, 초발심(初發心)의 수행이 바로 보리인 것이 된다.
12140대발열반. 4657의 ‘大涅槃’의 주.
12141대승은 원교의 인임. 원문은 ‘大乘是圓因’. 대승에도 여러 가지가 있으나, 지금은 원교의 가르침을 대승이라 한 것. 생사와 열반․번뇌와 보리를 원융의 관계에서 보기에, 단계적인 수행을 거치지 않는다.

 [석첨] 처음의 둘은 글 그대로다.

初二如文.

 [석첨] 이를 들어 여래의 행을 표방하니, 다른 *육도(六度)․*통교․별교의 행이 아니다. 앞에서는 비록 대승이라 이르기는 해도 *원융하게 움직이지는 못했으며, 앞에서는 비록 열반이라 이르기는 해도 *다(茶)를 지나고 나서야 그런 말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들은 곧 보살의 행일 뿐이니, 여래의 *일행(一行)이라고는 이를 수 없다.

擧此標如來行, 非餘六度通別登行. 前雖名大乘, 不能圓運. 前雖名涅槃, 過茶可說. 乃是菩薩之行, 不得名爲如來一行.

12142육도. 삼장교의 보살을 가리킨다. 4611의 ‘六度菩薩’의 주.
12143통교․별교. 원문은 ‘通別’. 248의 ‘五時八敎’의 주 참조.
12144원융하게 움직이지는 못했음. 원문은 ‘不能圓運’. 원융한 수행은 하지 못했다는 뜻. 가르침이 원융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12145다를 지나고 나서야 그런 말을 할 수 있음. 원문은 ‘過茶可說’. 실단(悉檀)의 사십이자문(四十二字門)의 마지막 글자가 다(dha)다. 그래서 이 글자를 자모(字母)의 구경(究竟)이라 하여, 이 글자를 지나서는 다시는 글자가 없다고 생각돼 왔다. 그러므로 천태대사의 스승 남악대사는 사십이자문으로 사십이위(四十二位)를 표현할 때, 이 ‘다’를 가지고 묘각(妙覺)의 위계를 나타냈다.
12146일행. 오직 하나의 행. 유일절대의 행. 궁극의 완전한 행이므로 하는 말.

 [석첨] 셋째로 물리친 글 중에서 ‘다를 지나서야 말할 수 있다’ 말함은, *별교의 묘각(妙覺)의 뒤에는 아직도 실위(實位)가 있으므로, 이 경지마저 지난 다음에야 설할 수 있다는 것이다.

三斥中云過茶可說者. 別妙覺後, 猶有實位, 故可說也.     

12147별교의 묘각의 뒤에는 아직도 실위가 있음. 원문은 ‘別妙覺後, 猶有實位’. 별교의 인위(因位)에서 이상으로 설정한 묘각은 진정한 묘각이 아니니, 묘각이 얻어진대도 진짜 묘각이 남는다는 뜻.

 [석첨] 넷째로 바로 원교의 행을 밝힌 것 중에 네 부분이 있으니, 처음에서는 간략히 취지를 세우고, 다음으로는 ‘如大論’ 아래서는 인용해 증명하고, 셋째로 ‘此經’ 아래서는 동일한 것을 인용하고, 넷째로 ‘今依’ 아래서는 *금경(今經)에 의거해 자세히 행상(行相)을 해석했다.

四正明中四. 初略立. 次如大論下, 引證. 三此經下, 引同. 四今依下, 依今經廣釋行相.

12148금경. 지금의 경. 곧 법화경.
12149행상. 수행의 양상.

 [석첨] 그러나 원교의 행(行)인 경우에는 *원만히 십법계(十法界)를 갖추고 있으므로 *일운일체운(一運一切運)이니, *이에 대승이라 이르며, 곧 *불승(佛乘)을 탐이 되니, 그러므로 여래행이라 이르는 것이다.

 若圓行者. 圓具十法界, 一運一切運, 乃名大乘. 卽是乘於佛乘, 故名如來行.

12150원만히 십계를 갖춤. 원문은 ‘圓具十法界’. 원교에서 볼 때는 온갖 행에 십법계가 갖추어져 있음이 된다는 것. 소위 십계호구(十界互具)의 도리니, 188의 ‘具攝三千’의 주 참조. 12151일운일체운. 하나를 움직이면 일체가 움직임. 한 행 속에 일체의 행이 포함되는 것. 오행(五行)에서 볼 때는, 그 어느 하나를 행해도 다른 행 모두를 행함이 되는 것.
12152이에 대승이라 이름. 원문은 ‘乃名大乘’. 별교에서와 같이 다른 것(소승)에 비교해 우수하다는 뜻에서 대승인 것이 아니라, 그런 대립이 완전히 끊어져 모두가 원융한 일체를 이루는 점을 대승이라 한다는 것. 아무리 다른 것에 비해 크다 해도 진정한 대(大)는 아니니, 소(小)를 배제하는 것에 의해 자신을 제한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진정한 대는 대소의 차별마저 사라져 일체를 포함할 수 있어야 한다.
12153불승을 탐. 원문은 ‘乘於佛乘’. 불승을 행하는 것. ‘불승’은 25의 주.

 [석첨] 처음의 것은 글 그대로다.

初如文.

 [석첨] 다음에서는 두 글을 인용해 증명했다. 처음에서는 대지도론을 인용했다.

次引二文證者. 初大論.

 [석첨] *대지도론(大智度論)에서 말한 것과 같다.
 ‘*초발심(初發心)으로부터 항상 열반을 관(觀)하여 *불도를 수행한다’고.

  如大論運. 從初發心, 常觀涅槃行道.

12154대지도론. 원문은 ‘大論’. 그 一一의 인용이다.
12155초발심. 1566의 ‘初發心者’의 주.
12156불도를 수행함. 원문은 ‘行道’.

 [석첨] 글 그대로다.

如文.

 [석첨] 다음에서는 대품을 인용했다.

次大品.

 [석첨] 또한 *대품(大品)에서 이른 것과 같으니, ‘초발심으로부터 *행(行)하며 낳으며 닦고, 내지는 *도량(道場)에 앉아서도 행하며 낳으며 닦는다’고.
 ‘*필경(畢竟)과 발심(發心)의 둘이 다르지 않다는 것이어서, 다 여래행(如來行)의 취지다.

亦如大品云. 從初發心行生修, 乃至坐道場, 亦行生修. 畢竟發心二不別, 皆如來行意也.

12157대품. 1302의 주. 그 삼혜품(三慧品)의 인용이다.
12158행하며 낳으며 닦음. 원문은 ‘行生修’. 행은 반야바라밀을 처음으로 실천하는 일. 생은 반야바라밀을 행하는 것에 의해 그 나름의 지혜를 낳는 일. 수는 그 나름의 지혜를 얻고 나서도 거듭 닦는 일. ‘행’이나 ‘수’나 닦는 점에서는 같으나, 처음의 것을 ‘행’이라 하고 뒤의 것을 ‘수’라 한 것뿐이다.
12159도량에 앉음. 원문은 ‘坐道場’. 성도하는 단계의 뜻. ‘도량’에 대하여는 1124의 주. 이것을 일부의 주석에서 ‘초주 이상’이라 한 것은 잘못이니, 그렇게 되면 다음에 오는 ‘필경’이라는 말과 어울리지 않는다.
12160필경과 발심의 둘이 다르지 않음. 원문은 ‘畢竟發心二不別’. 6314의 ‘發心畢竟二不別’의 주.

 [석첨] 글 중에서 ‘행(行)하며 낳으며 닦는다’고 말함은, *대지도론 八0이 먼저 다음 같은 경의 말씀을 들어 보인 것과 관계가 있다.
 *수보리(須菩提)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보살은 어떻게 반야바라밀을 행하며, 어떻게 반야바라밀을 낳으며, 어떻게 반야바라밀을 닦나이까?
 부처님께서 대답하셨다.
  <색(色)은 *적멸(寂滅)한 것이기에, *색은 *거짓된 것이기에, 색은 *부실(不實)한 것이기에, 반야바라밀을 응당 행하며 응당 낳으며 응당 닦아야 하는 것이니, *수(受)․상(想)․행(行)․식(識)도 또한 이와 같다.>
 수보리가 또 여쭈었다.
 <행하며 낳으며 닦는 것은 어느 때에 해야 하는 것이겠습니까?>
 부처님이 말씀하셨다.
 <초발심 내지는 좌도량(坐道場)에서 반야바라밀을 행하며, 반야바라밀을 낳으며, 반야바라밀을 닦아야 하느니라.>
 이미 처음과 뒤에서 함께 행하며 낳으며 닦는다 하신 바에는 곧 원교의 도리인 것이니, 그러므로 알 수 있는 것은 곧 행할 때에 낳으며, 낳기 때문에 다시 닦는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경에는 다시 이런 말씀이 보인다.
 수보리가 말했다.
 ‘*차제심(次第心) 가운데서 응당 행하며 낳으며 닦는 따위의 일을 해야 하는 것이겠습니까?’
 부처님이 말씀하셨다.
 ‘항상 *살바야(薩婆若)의 마음을 떠나지 않아서 다른 생각으로 하여금 침입해 오지 못하게 함을, 행한다 하며 낳는다 하며 닦는다 하는 것이니, 만약 *심심수법(心心數法)이 작용하지 않는다면, 이를 행한다 하며 낳는다 하며 닦는다 하는 것이니라.’
 이에 대해 어떤 사람은 해석하여 이르기를,
 ‘행한다 함은 *간혜지(幹慧地)에 있음을 말하며, 낳는다 함은 무생인(無生忍)에 있음을 말하며, 닦는다 함은 무생인 이후의 경지에 해당한다.’고 했으나, 이는 통교의 취지일 뿐이요, 만약 이 통교의 취지에 준한다면 *별교의 해석도 미루어 알 수 있을 것이나, *다 지금의 취지는 아니다.

文中云行生修者. 大論八十, 先擧經云. 須菩白佛. 菩薩云何行般若波羅蜜, 云何生般若波羅蜜, 云何須般若爬羅蜜. 佛言. 色是寂滅故, 色是虛誑故, 色不實故, 應行應生應修般若波羅蜜. 受想行識, 亦復如是. 須菩提又問. 行生須幾時. 佛言. 初發心乃至坐道場, 行般若波羅蜜, 生般若波羅蜜, 須般若波羅蜜. 旣言初復俱行生修, 卽圓義也. 故知卽行時生, 生故復修. 故經復云. 須菩提言, 次第心中, 應行生修等耶. 佛言. 常不離薩婆若心, 不令餘念得入, 爲行爲生爲修. 若心心數法不行, 爲行爲生爲修. 有人釋云. 行在幹慧地, 生在無生忍, 修在無生忍後. 此通意耳. 若準通意, 例別可知, 竝非今所用.
 
12161대지도론 八0. 원문은 ‘大論八十’. 대지도론 八三으로 해야 한다.
12162수보리. 불제자의 이름. 해공(解空) 제일이라 일컬어진 인물.
12163색. 오온(五蘊)의 하나. 2497의 ‘五衆’의 주 참조.
12164적멸. 온갖 대립․차별이 끊어진 상태. 열반.
12165거짓됨. 원문은 ‘虛誑’.  
12166부실. 진실하지 않은 것. 실재하지 않는 것.
12167수․상․행․식. 2497의 ‘五衆’의 주 참조.
12168차제심. 진리를 순서적으로 닦아야 한다고 여기는 마음.
12169살바야. 6801의 주.
12170심심수법. 8213의 주.
12171간혜지. 통교십지(通敎十地)의 첫 위계. 간혜는 윤기가 없는 지혜란 뜻이니, 열등한 지혜를 이른다. 통교의 초지에서는 오정심(五停心)․총별념처(總別念處)를 닦아 관행(觀行)의 지혜는 생겼다 해도, 아직 진제(眞諦)의 지혜와는 멀므로 이리 이른다.
12172무생인에 있음. 원문은 ‘在無生忍’. 처음으로 진제의 도리를 보는 견지(見地)를 말하는 것 같다. 견지는 통교십지의 넷째 위계다. ‘무생인’은 1205의 주.
12173별교의 해석도 미루어 알 수 있을 것임. 원문은 ‘例別可知’. 별교의 취지에서 볼 때, 행한다 함은 지전(초지 이전)이요, 낳는다 함은 초지요, 닦는다 함은 이지(二地) 이상임이 될 것이라는 뜻이다. 
12174다 지금의 취지는 아님. 원문은 ‘並非今所用’. 직역하면 ‘모두가 지금에 쓰일 바는 못된다’는 것. 원교에 서 있는 지금은, 그 같은 통교․별교의 견해는 채택할 수 없는 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