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여광의 서역원정(장안에서 고창을 향하여)
전진왕 부견에 의해서 일어난 서역원정은 381년 2월에 내조했던 선선왕 휴밀타(休密馱)와 거사전왕 미치(彌寘)의 요청에 의해 이루어졌다. 이때 사특절 도독감 서토제군사로 서역원정의 총사령관으로는 여광이 임명되었다. 여광의 아버지 여파루(呂婆樓)는 낙양에 (협서성 낙양현) 한 씨족의 촌장이었다. 부견과는 같은 고향, 같은 종족으로 서로 뜻을 같이 했다. 그래서 부견이 거병擧兵하자 여기에 큰 힘을 보태게 되었다. 만년에는 이러한 보답으로 태위까지 승진한 사람이다. 부견은 그(여파루)의 아들인 여광에 대해 깊이 신뢰했다. 그리고 여광은 이러한 부견에 대해 깊이 충성을 다하여 끝까지 신의를 지켰다. 이러한 사실은 후에 부견이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상복을 입고 몹시 슬퍼했다는 것에서 잘 알 수 있다.
원정군은 여광을 중심으로 강비․팽황․두진․강성 장군으로 하여금 따르게 하고, 7만 여의 병사와 5천 여의 철기군을 주었다.(<출삼장기집> <고승전> 라집전과 <진서>부견의 기록과 여광전에는 이때 7만을 파병했다고 하고, <위서> 여광전에는 7천, <자치통감>에는 10만이라 한다. 여기서는 <출삼장기집> 등의 기록을 따랐다.)
이 원정에 대하여 앞에서도 보았던 일족의 중진 부융(符融)은 “중국을 허비하는 일로는 만리에 사병을 보내는 것이라 할 수 있으니 그들을 얻어 일을 부릴 수도 없고, 그 땅을 얻어 경작할 수도 없다”(<진서> 부견의 기사)라고 하여 서역 원정으로 얻는 이익이 없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부견은 여기에 조금도 귀 기울이지 않았다.
“두 한나라(전한․후한)가 힘으로 흉노를 제압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역시 군을 서역에 보냈을 것이다. 지금 흉노가 이미 평정되었다면 이는 썩은 나무를 쓰러뜨리는 것과 같이 쉬운 일이다. 군대를 멀리 원정의 일에 보냄으로써 격문을 전하는 일을 정할 수밖에 없다. 교화가 곤륜산에 미치고 영예가 천년에 드리운다면 또한 아름답지 않은가”(<진서> 부견의 기사)
라 하고 있다. “흉노에 시달렸던 전한․후한 때에도 서역 원정을 멈추지 않았는데 이때 사정은 흉노가 괴롭혔기 때문에 서역 원정을 하지 않도록 억제하는 것이 중요했지만 흉노가 없는 지금 이를 단행하지 않는다면 한층 우스운 일이 될 것이다. 또 국위를 멀리까지, 그리고 후세에까지 드날릴 수 있지 않겠는가” 라고 그 당위성을 주장하고 있다. 이를 통해서 보면 부견왕은 서역 원정을 통해서 국위를 멀리까지 떨치고 후세에까지 드날리려고 했었음을 알 수 있다. 분명히 부견은 자신을 중국의 통일 황제에 견주려 했던 것이다. 그래서 여광이 출정할 때 건휘궁으로 불러서 다음과 같이 훈시했다.
“서역은 풍속이 황량하고 예의가 없는 나라이다. 제대로 길들이는 방법은 이들을 정복한 후 놓아주어 중국의 위엄을 보여주고 왕의 교화 법으로 인도해야 한다. 무력을 지나치게 사용하고 병사들이 함부로 행동하여 지나치게 사람을 해치고 빼앗는 일을 해서는 안된다.(<진서> 부견기사)
이를 <고승전> 라집전에는 “무릇 제왕은 하늘에 응해서 다스리고 창생을 자식처럼 사랑하는 것으로써 근본을 삼는다. 어찌 그 땅을 탐하여 정벌함이겠는가. 바른 도를 품고 있는 사람들 때문에 원정하는 것이다.”
라 하고 있다. 그는 아무래도 유교의 덕치주의로 서역을 교화하고자 했으며, 그것이 여의치 못하면 무력을 써서 나라의 위엄을 발휘하도록 했다. 다시 계속해서 여광은 <라집전>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짐이 듣기로 서국에 구마라집이 있다고 한다. 깊이 법의 실상을 이해하고, 음양을 잘 익혀서 후학들의 근본이 되었다고 한다. 짐이 깊이 생각하니 현철은 국가의 큰 보배이다. 만약 구자국에 들어간다면 곧 서역으로 말을 달려 라집법사를 호송하라.”
라고 했다.
그렇다면 전진왕 부견의 서역원정 목적의 하나는 구자국에 있는 라집법사를 초청하는 것이었다는 것이 확실하다. 그밖에 서역 제국을 따라 교역을 통해 이익을 얻으려는 목적은 더 이상 부언할 필요가 없다.
382년 9월 사특절 도감 서토제군사가 된 여광은 병력 7만을 이끌고 선선왕 휴밀태, 거사전부왕 미치(또는 彌第라고도 함)를 선두로 하여 장안을 출발하여 서역 원정의 길에 올랐다. 일행은 이른바 하서회랑(河西回廊)을 지나 금성(金城)을 거처 호장(胡臧)에 도달했다. 호장은 일찍이 전량의 수도로 풍요로운 동네이다. 여기서 여광은 후에 이곳에 나라를 세우리라고 생각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뒤의 후량 건국조에서 서술한다. 여기서 일행중 선선왕 휴밀태가 갑자기 사망했다.(<진서> 예술전에 그의 사인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다.
이런저런 사건이 일어났지만 원정은 그대로 계속되었다. 여기부터 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