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고창(高昌)에서 언기(焉耆)까지
여광이 고창에 머무르면서 언기로 진군할 준비를 하고 있을 때 본국에서는 부견이 강남원정에 나섰다는 소식이 들렸다. 이에 대해서는 앞에서 이미 언급한 것과 같이 383년 9월 혹은 10월의 일일 것이다. 여광은 여기서 멈추고 군대를 돌려야 할지 혼란스러워 후명을 기다리고자 했다. 그러나 부장 두진이 강력하게 계속 진군할 것을 주장해서 그대로 원정을 계속해 나가게 되었다. 이때까지 여광은 부견의 강남원정에 대한 소식을 알지 못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본래 이 서역 원정은 선선왕과 거사전왕의 강력한 요청에 의하여 원정을 일으켰기 때문에 이 두 나라가 여기서 퇴각하는 것을 가장 반대했을 것이다. 여광으로서도 많은 준비를 해왔기 때문에 아무런 전과戰果도 얻지 못하고 귀국한다는 것은 큰 부담이 아닐 수 없었다. 마침내 여광은 전진前進을 결정했다. 여광은 아득히 본국의 산하山河를 떠올리고 이 결단을 내렸을 것이다.
고창에서 언기까지는 900리(약 400km)길이라고 한다.('북사' 서역전) 일찍 고창을 출발했던 여광의 군대는 300리(약135km) 정도 지나도록 물이 없는 유사(流沙)에 시달리면서 진군하고 있었다. 고창에서 언기로 가는 고미탄 사막을 진군하기란 지극히 힘든 행군이었다. 병사들은 이미 절망에 빠져 사색이 되었다. 이 때 여광은 “우리는 (한)의 이광리가 정성을 다하자 감응이 있어 샘이 솟았던 일을 들었다. 우리만 어찌 감응을 만나지 않겠는가. 황천이 반드시 구해줄 것이다. 제군들은 걱정하지 말라.”라고 하면서 격려하였다. 이 땅은 이광리가 통과 했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여광의 말처럼 마침내 효험이 있어 큰 비가 내렸다.
이제 융구스반드(F.E. Younghusband 1863~1942)가 1887년 7월 고창에서 언기까지 여행한 기록을 보면 이 때의 사정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7월 18일 오후 5시 10분 출발해서 중국인 마을을 지나 서문을 빠져나와 다시 투르크인들 마을을 통과해서 서쪽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면화가 많이 심어져 있는 평원을 넘었다. 보리는 벌써 대부분 베어져 있었다. 누에고치의 수확도 끝나고 있었다. 8km되는 지점에는 천산 산맥에서 달려온 낮은 산맥들이 뻗어 내렸다. 그 말단을 돌아 일대가 모두 관목들로 덮인 미경작지의 평탄한 평원을 넘었다. 맹렬한 바람이 불어와 앞으로 나가는 것이 점차 지체되었다. 투르판(Turfan, 高昌)에서 36km, 오전 11시 겨우 단칸방 객실을 얻어 쉬었다.
7월 19일 오전 3시 출발했다. 변함없이 평원을 넘어 좌측으로 경작지 쪽으로 천천히 접근했다. 오전 8시 30분 도그슨에 멈추었다. 이곳은 작은 마을이라고 하기 보다는 두 개의 작은 동네로서 800m에 세워진 성벽이 끝나는 곳에 사방 약 400m에 달하는 구역이 있다. 이곳에는 소규모의 수비대가 주둔하는데 병력은 400에서 500명쯤 될 것이다. 상점은 아주 작다. 여기에도 투르판에도 포도와 멜론이 아주 풍부하다. 투르판의 포도는 상당히 양질인데 영국의 온실에서 재배한 것에 필적할 만큼 맛이 좋았다. 열매가 커서 과육이 풍부하며 아주 좋은 향기가 난다. 여기 있는 종류는 특히 커서 한 알이 3.8cm 내지 4.5cm정도로 큰 것이다.
오후 3시 40분에 다시 출발해서 남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경작지가 1km 정도 이어지고 얼마가지 않아 관목 있는 장소가 나타난다. 관목은 5km 앞서다가 사라진다. 남쪽 연산(連山)에는 초목 하나 없는 사막으로 이 경사면을 따라 올라갔다. 사막은 모래가 많이 섞여 있어 발을 내딛는 대로 빠져 버려 앞으로 나아가는 데 힘이 들었다. 우리는 천천히 전진했다. 여기까지는 도로 흔적을 아는 것이 어려운 장소라고 한다. 여기저기에는 말의 해골이 뒹굴고 있다. 두 개의 인간 해골이 있는 옆을 통과했다. 도그슨에서 25.6km 되는 곳에서 산속으로 들어갔다. 산들은 어느 곳이나 나무나 풀이 하나도 없다. 다시 6.4km 전진해 가니 작은 내 옆에 숙실이 있어 그곳에 숙박했다.”('카라코람을 넘어서' 141~142항)
이처럼 오늘날에는 상상하기 힘든 어려운 일들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를 통해 미루어 보더라도 당시 여광 일행이 겪은 고난의 행군을 쉽게 상상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기에 도착한 여광의 군軍은 그다지 고전을 했다는 기색도 없이 쉽게 이곳을 정복한 것처럼 보인다. '진서' ‘여광전’에 의하면 “그 나라 왕 니류(泥流)는 그 곳의 여러 나라를 이끌고 항복을 청하였다.” 라고 하는 대목이 보인다. 그 나라의 왕이란 '진서' 언기전에는 희(熙)라 하고 있다. 희란 중국식 이름으로, 니류는 지역 이름이다. 여러 나라들이란 위리(尉犂), 위수(危須), 산왕(山王)을 가리킨다. 이제 언기를 함락시킨 여광의 군은 사막에서 구자로 향했다.
7. 구자국 함락
언
여광이 고창에 머무르면서 언기로 진군할 준비를 하고 있을 때 본국에서는 부견이 강남원정에 나섰다는 소식이 들렸다. 이에 대해서는 앞에서 이미 언급한 것과 같이 383년 9월 혹은 10월의 일일 것이다. 여광은 여기서 멈추고 군대를 돌려야 할지 혼란스러워 후명을 기다리고자 했다. 그러나 부장 두진이 강력하게 계속 진군할 것을 주장해서 그대로 원정을 계속해 나가게 되었다. 이때까지 여광은 부견의 강남원정에 대한 소식을 알지 못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본래 이 서역 원정은 선선왕과 거사전왕의 강력한 요청에 의하여 원정을 일으켰기 때문에 이 두 나라가 여기서 퇴각하는 것을 가장 반대했을 것이다. 여광으로서도 많은 준비를 해왔기 때문에 아무런 전과戰果도 얻지 못하고 귀국한다는 것은 큰 부담이 아닐 수 없었다. 마침내 여광은 전진前進을 결정했다. 여광은 아득히 본국의 산하山河를 떠올리고 이 결단을 내렸을 것이다.
고창에서 언기까지는 900리(약 400km)길이라고 한다.('북사' 서역전) 일찍 고창을 출발했던 여광의 군대는 300리(약135km) 정도 지나도록 물이 없는 유사(流沙)에 시달리면서 진군하고 있었다. 고창에서 언기로 가는 고미탄 사막을 진군하기란 지극히 힘든 행군이었다. 병사들은 이미 절망에 빠져 사색이 되었다. 이 때 여광은 “우리는 (한)의 이광리가 정성을 다하자 감응이 있어 샘이 솟았던 일을 들었다. 우리만 어찌 감응을 만나지 않겠는가. 황천이 반드시 구해줄 것이다. 제군들은 걱정하지 말라.”라고 하면서 격려하였다. 이 땅은 이광리가 통과 했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여광의 말처럼 마침내 효험이 있어 큰 비가 내렸다.
이제 융구스반드(F.E. Younghusband 1863~1942)가 1887년 7월 고창에서 언기까지 여행한 기록을 보면 이 때의 사정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7월 18일 오후 5시 10분 출발해서 중국인 마을을 지나 서문을 빠져나와 다시 투르크인들 마을을 통과해서 서쪽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면화가 많이 심어져 있는 평원을 넘었다. 보리는 벌써 대부분 베어져 있었다. 누에고치의 수확도 끝나고 있었다. 8km되는 지점에는 천산 산맥에서 달려온 낮은 산맥들이 뻗어 내렸다. 그 말단을 돌아 일대가 모두 관목들로 덮인 미경작지의 평탄한 평원을 넘었다. 맹렬한 바람이 불어와 앞으로 나가는 것이 점차 지체되었다. 투르판(Turfan, 高昌)에서 36km, 오전 11시 겨우 단칸방 객실을 얻어 쉬었다.
7월 19일 오전 3시 출발했다. 변함없이 평원을 넘어 좌측으로 경작지 쪽으로 천천히 접근했다. 오전 8시 30분 도그슨에 멈추었다. 이곳은 작은 마을이라고 하기 보다는 두 개의 작은 동네로서 800m에 세워진 성벽이 끝나는 곳에 사방 약 400m에 달하는 구역이 있다. 이곳에는 소규모의 수비대가 주둔하는데 병력은 400에서 500명쯤 될 것이다. 상점은 아주 작다. 여기에도 투르판에도 포도와 멜론이 아주 풍부하다. 투르판의 포도는 상당히 양질인데 영국의 온실에서 재배한 것에 필적할 만큼 맛이 좋았다. 열매가 커서 과육이 풍부하며 아주 좋은 향기가 난다. 여기 있는 종류는 특히 커서 한 알이 3.8cm 내지 4.5cm정도로 큰 것이다.
오후 3시 40분에 다시 출발해서 남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경작지가 1km 정도 이어지고 얼마가지 않아 관목 있는 장소가 나타난다. 관목은 5km 앞서다가 사라진다. 남쪽 연산(連山)에는 초목 하나 없는 사막으로 이 경사면을 따라 올라갔다. 사막은 모래가 많이 섞여 있어 발을 내딛는 대로 빠져 버려 앞으로 나아가는 데 힘이 들었다. 우리는 천천히 전진했다. 여기까지는 도로 흔적을 아는 것이 어려운 장소라고 한다. 여기저기에는 말의 해골이 뒹굴고 있다. 두 개의 인간 해골이 있는 옆을 통과했다. 도그슨에서 25.6km 되는 곳에서 산속으로 들어갔다. 산들은 어느 곳이나 나무나 풀이 하나도 없다. 다시 6.4km 전진해 가니 작은 내 옆에 숙실이 있어 그곳에 숙박했다.”('카라코람을 넘어서' 141~142항)
이처럼 오늘날에는 상상하기 힘든 어려운 일들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를 통해 미루어 보더라도 당시 여광 일행이 겪은 고난의 행군을 쉽게 상상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기에 도착한 여광의 군軍은 그다지 고전을 했다는 기색도 없이 쉽게 이곳을 정복한 것처럼 보인다. '진서' ‘여광전’에 의하면 “그 나라 왕 니류(泥流)는 그 곳의 여러 나라를 이끌고 항복을 청하였다.” 라고 하는 대목이 보인다. 그 나라의 왕이란 '진서' 언기전에는 희(熙)라 하고 있다. 희란 중국식 이름으로, 니류는 지역 이름이다. 여러 나라들이란 위리(尉犂), 위수(危須), 산왕(山王)을 가리킨다. 이제 언기를 함락시킨 여광의 군은 사막에서 구자로 향했다.
7. 구자국 함락
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