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구자국 함락
구자의 속국이었던 온숙(溫宿) ․ 위두(尉頭) 또는 우방국 소륵(疏勒) 등도 구원군을 파견했다. 그 총 병력은 70만여에 이른다고 한다. 이에 대해 여광의 군대는 7만인이었기 때문에 실제로는 십분지 일이었다. 여광으로서는 서역원정에 있어서 최대의 위기였다고 해도 틀리지 않는다. 이대로라면 포위되어 전멸당할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여광은 산재해 있던 진영을 결집시켜 구쇄(勾鎖)의 법으로 자물쇠 모양의 진을 만들어 방어전을 폈다. 이와 같이 머물면서 적병과 대치하고 있는 사이, 갑자기 정예의 기병을 구자국 성의 서쪽 입구로 보내서 공격을 감행했다. 이 전투에서 1만여 명을 살해하는 전과를 올렸다. 이때가 384년 7월의 일이었다. 이 사건은 당시 전황(戰況)을 급변시키는 큰 분수령이 되었다. 적의 70만 대군이 동요하면서 차례로 붕괴했기 때문이다. 대군이라고 하지만 통솔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오합지졸의 군대였던 것이다. 마침내 구자성은 함락되고 그 나라 왕 백순(白純)은 성안의 보배를 가지고 달아나 숨어버렸다. <고승전> 제2권 불타야사전(佛陀耶舍傳)에는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그때 부견 여광을 보내 서역의 구자를 정벌하도록 했다. 구자왕은 급히 사륵(곧 소륵)에 구원을 청했다. 사륵왕이 몸소 군병을 이끌고 이에 응하였다. 야사로 하여금 머물러 태자를 보위하여 후사를 도모하도록 맡겼다. 그러나 구원군이 아직 도착하기도 전에 구자는 이미 패했다.”
70만이라고 한 구자측 대군 속에는 사륵왕의 군도 있을 것이다. 불타야사가 소륵에 있으면서 라집의 안부에 신경을 곤두세웠던 것도 이때다. 그의 구원군도 패해버려 여광의 군은 드디어 구자성에 입성했다. 여광은 부하들과 함께 축배를 들고 그동안의 노고를 치하했다. 그의 병사들은 마치 굶주렸던 이리와 같이 성안을 돌아다니며 서장에서 들여온 그 지역 특산품 포도주에 취해서 비틀거리며 다니는 자가 속출했다. 전쟁에 승리한 여광은 구자의 궁성을 돌아보고 그 장려함에 감탄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지나게 불필요한 장식을 많이 한 건물과 화려한 모습에 업신여기는 생각을 품고 있었다. 문필에 뛰어났던 경조(京兆 곧 장안) 출신 참전군 단업(段業)을 불러 <구자궁부(龜玆宮賦)>를 짓고 구자성의 장려함을 기록하도록 했다고 한다. 다만 이 저술은 유감스럽게도 현존하지 않는다.
그런데 여광은 구자성을 점령하고 “만약 구자를 정벌하면 곧 역마를 달려 라집법사를 후송하라”는 부견의 말을 생각했을 것이다. 라집은 여광의 근대에 곧 붙잡히게 되었다. <출삼장기집> 라집전에는,
“여광은 마침내 구자를 격파하고 백순왕을 죽이고 라집법사를 사로잡았다. 여광은 성미가 조급하고 자만심이 있었다. 그래서 라집법사의 지혜와 도량을 헤아리지 못했다. 단지 라집의 나이가 어린 것만을 보고 곧 평범한 사람으로 여겨 그를 희롱하고 강제로 구자국의 왕녀를 처로 맞게 하였다. 그러나 라집은 거부하고 받아들이지 않았다. 계속 사양하자 그는 아주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 여광은 “도사의 지조는 선부(先父 곧 라집의 아버지)보다 뛰어나지 않으면서 어찌 사양하는가”라고 말하며 라집에게 독한 술을 억지로 마시게 하여 왕녀와 함께 밀실에 넣고 가두었다. 라집은 핍박에 못 이겨 마침내 그의 절개를 헐게 되었다. 여광은 또한 어떤 때는 라집을 소에 태우거나 포악한 말에 태워 떨어지도록 했다. 그러나 라집은 인욕심(忍辱心)을 잃지 않고 조금도 얼굴빛을 바꾸지 않았다. 그러자 여광도 점차 자신의 행동을 부끄럽게 여기고 그만 두었다.”
라 기록되어 있다.
이와 같이 <출삼장기집>에서 구자왕 백순을 죽였다고 하는 것은 <고승전> 등의 기록을 따른 것으로 그의 생사는 확실히 알려져 있지 않다.
라집은 패배한 나라 백성의 한 사람으로서 받는 치욕을 손수 맛보지 않을 수 없었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라집의 파계 사정을 전하는 일단의 언급이다. 앞에 보았던 월씨족 북산에 있던 한 아라한의 예언에 따르면, 라집이 파계한 것은 35세 때 의 일이다. 승려이면서 이성과 교통한 것은 바라이죄(pārājika) 곧 교단 추방의 죄를 지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대승의 계율사상이 발전했던 당시로서 구자에 있건 중국에 있건 이는 변하지 않는다. 다만 구자는 이때 패전의 혼란기였고, 정복자 여광이 강제로 결혼시켰기 때문에 구자의 불교계도 십분 동정을 보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를 환영할 만한 일로 보지 않았던 것은 확실하다. 구자의 불교계에서 라집을 어떻게 보았을까 하는 것과 상관없이, 라집 스스로 자신이 바라이죄를 범한 파계승이라고 하는 자책감을 떨쳐버리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이러한 마음은 그가 생을 마칠 때까지 계속되었다.
라집은 지금까지 왕가의 일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