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첨] 위계의 수(數)에 대해서는, 사람들의 해석이 동일하지 않다. 그리하여 어떤 사람은 말하되,
 ‘*돈오(頓悟)하면 바로 부처라, 다시 위계의 차별은 없다.’
하여 *사익경(思益經)에서
 ‘이같이 배우는 자는 *일지(一地)에서 일지에 이르지 않는다.’
고 말씀한 것을 인용하기도 했다.
 또 어떤 스님은 말하되,
 ‘*돈오의 초심(初心)은 곧 구경(究竟)의 원극(圓極)이니, 그러면서도 *사십이위(四十二位)가 있는 것은 둔근을 교화하는 방편 때문에 얕고 깊은 위계의 이름을 세운 것뿐이다.’
하여, *능가경에서
 ‘초지(初地)는 곧 이지(二地), 이지는 곧 삼지(三地)일 따름이니, *적멸진여(寂滅眞如)에 어떤 위계가 있으랴.’
고 이르신 것을 인용하기도 했다.
 또 어떤 스님은 말하되,
 ‘처음에 돈오하여 십주(十住)에 이름은 바로 십지(十地)니, 그런데도 십행․십회향․십지 있다고 설하는 것은 *중설(重說)일 뿐이다.’
라 하기도 했다.

數者. 人解不同. 有言頓悟卽佛, 無復位次之殊. 引思益云, 如此學者, 不從一地至一地. 又有師言, 頓悟初心, 卽究竟圓極. 而有四十二位者, 是化鈍根方便, 立淺深之名耳. 引楞伽經云, 初地卽二地, 二地卽三地. 寂滅眞如, 有何次位. 又有師言, 初頓悟至十住, 卽是十地. 而說有十行十廻向十地者, 此是重說耳.

13672돈오. 일시에 깨닫는 것. 순차적인 단계를 거침없이 바로 깨닫는 것.
13673사익경. 2975의 주.
13674일지에서 일지에 이르지 않음. 원문은 ‘不從一地至一地’. 한 경지(위계)에서 한 경지에 이르는 따위로 점차적인 수행법을 쓰지 않는 일.
13675돈오의 초심은 곧 구경의 원극임. 원문은 ‘頓悟初心, 卽究竟圓極’. 돈오의 초심이란 돈오하는 처음 단계니, 십주(十住)의 위계. 구경의 원극이란 깨달음이 최고에 도달해 원만하고 지극해짐을 이르니 묘각(부처님)의 위계. 곧 돈오하면 바로 부처님이 된다는 뜻이다.
13676사십이위. 오십이위에서 십신을 제외한 내용.
13677능가경. 원문은 ‘楞伽’. 여래장연기(如來藏緣起)에 대해 설하신 경. 七권. 당나라 실차난타의 번역.
13678적멸진여에 어떤 위계가 있으랴. 원문은 ‘寂滅眞如, 有何次位’. 적멸은 녈반의 다른 이름이요, 진여는 진리 자체를 이른다. 그리고 녈반은 진여와 합일(合一)한 상태이므로 둘은 같은 말로 보아 무방하나, 능가경 四의 원문은 ‘無所有何次’라 되어 있고, 또 텍스트에 따라서는 ‘無相有何次’라 되어 있을 뿐, ‘적멸진여’라는 말은 안 보인다.
13679중설. 거듭 설하는 것.

 [석첨] *처음의 스님들의 뜻은 모두가 위계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의 글을 나열한 것뿐이니, 혹은 *억견(臆見)을 일으킨 점에서 *대도(大途)에 해당하지 않고, 혹은 경의 글을 인용하되 *성자의 뜻이 다름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므로 이런 견해들은 깨야 한다.
 그리고 ‘돈오의 초심은 곧 구경의 원극’이라는 견해도 있었다. *그러나 화엄경 중에서 설해진 위계는 원교․별교를 겸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사람들은 *두 가르침의 위계의 뜻을 깊이는 이해하지 못했고, 또 *원교의 위계의 시종(始終)에도 통달하지 못한 탓에 바로 초심(初心)을 가리켜 묘각(妙覺)이라 여겼다. 그리하여 오직 *돈문(頓門)의 성불의 빠름만을 숭상하여 *원교의 후위(後位)는 공연히 시설하신 것 같은 결과가 되고, 겸하여 부처님이 번거롭게 중언부언하시는 과오를 범하신 듯한 결과를 가져왔다. 그러므로 옛 스님들의 판단에 의거한다는 것은 참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라 해야 한다.

初師意者, 並列無位之文. 或生臆見, 未當大途. 或引經文, 不曉聖者意別. 是故須破. 頓悟初心卽究竟者. 然華嚴中, 位兼圓別. 人不通曉兩敎位意. 又復不達圓位始終. 直指初心, 以爲妙覺. 唯尙頓門成佛速疾. 乃成圓敎後位徒施. 兼成出佛煩重之過. 故依舊判, 誠爲未可.

13680처음의 스님들의 뜻. 원문은 ‘初師意’. 글만 보면 ‘처음의 스님의 뜻’임이 되지만, 이것은 세 견해를 다시 나누어, 첫째와 셋째의 스님의 해석을 하나로 묶은 것을 가리킨다.
13681억견. 제멋대로 생각해낸 견해. 이들은 수행의 불필요성을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절대적 진리에서 보면 수행은 없는 것이 되나, 그것은 진리를 깨닫고 난 뒤에 일일 뿐이니, 처음부터 수행하지 않는다면 깨달음이 나타날 리가 없다.
13682대도. 진리에 이르는 큰 길(수행). 
13683성자. 부처님을 가리킨다.
13684그러나 화엄경 중에서. 원문은 ‘然華嚴中’. 능가경을 인용했는데도 화엄경을 들어 비판한 것은, 그 주장이 화엄종의 현수(賢首)․청량(淸凉)의 설과 동일하기 때문이다.
13685두 가르침의 위계의 뜻. 원문은 ‘兩敎位意’. 수행을 인(因)으로 보고 깨달음을 과(果)라 여기는 처지에서, 수행이 깨달음에 접근해가는 데서 나타나는 여러 단계를 구별한 것이 별교의 위계다. 이에 비해 원교에서는 ‘번뇌즉보리’라 일컫듯 수행과 깨달음을 하나로 보지만, 수행하는 사람의 처지에서는 그 도리에 얕게 들고 깊게 드는 차별이 생겨남을 멸할 수 없어, 이 같은 차별을 위계로 나타나게 된다. 그러므로 같은 五二위나 四二위를 쓴대도 그 양상이 달라진다.
13686원교의 위계의 시종. 원문은 ‘圓位始終’. 원교의 위계가 시작되어서 끝나기까지의 과정. 13687돈문. 돈교.
13688원교의 후위. 원문은 ‘圓敎後位’. 원교의 뒤의 위계.

 [석첨] 둘째로 배척하는 것 중에는 셋이 있다. 

次斥中三.

 [석첨] *이제 이르건대, 이 여러 해석은 다 *편벽된 집착일 뿐이다.

今謂諸解, 悉是偏取.

13689이제 이르건대. 원문은 ‘今謂’. 천태대사 자신의 견해임을 나타낸다.
13690편벽된 집착. 원문은 ‘偏取’.

 [석첨] 처음 전반적으로 배척하는 중에서 ‘다 편벽되다’고 말한 것에 대해 생각건대, *이(理)에 입각할 때는 *깨닫는 법(진리)에 이름이 없음이 되나, *사(事)에 입각할 때는 여러 위계가 없지 않으니, 그러므로 여러 스님들이 편벽되게 이(理)를 좇아 설한 것임을 알 수 있다.

初總斥中, 云悉是偏者. 約理則證法無名, 約事則不無諸位. 故知諸師偏從理說.

13691이. 2603의 ‘事理’의 주 참조.
13692깨닫는 법. 원문은 ‘證法’.
13693사. 2603의 ‘事理’의 주 참조.

 [석첨] 두 번째로 ‘然’ 아래서는 따로 논난하는 뜻을 말했다.

次然下, 別述難意.

 [석첨] 그런데 *평등법계(平等法界)는 깨달음과 깨닫지 못함도 논하지 않거니, 누가 수행의 경지의 얕고 깊음을 논하랴. 그러나 이미 깨달음과 깨닫지 못함이 엄연히 존재하는 점에서 이를 논할 수 있는 것이라면, 어찌 그 수행의 얕고 깊음을 논한다 해서 지장이 되랴.

然平等法界, 尙不論悟與不悟, 孰辨淺深. 旣得論悟與不悟, 何妨論於淺深.

13694평등법계. 평등하여 차별이 없는 진리. 절대적 진리에는 오(悟)와 불오(不悟)․번뇌와 보리 따위 온갖 분별이 없는 일을 이른다.

 [석첨] 앞의 세 스님들은 다 같이 돈오를 내세웠기에 전반적으로 하나의 돈오의 도리를 써서 이를 배격한 것이니, 경을 인용한대도 취지를 상실한다면 그 진리는 스스로 이지러질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깨달음을 곧 *초주(初住)요 깨닫지 못함은 곧 *주전(住前)임을 아노니, 이미 깨달음과 깨닫지 못함이 있음을 *승인해야 한다면, 어찌 *양위(兩位)에 함께 얕고 깊음이 있어서 오십이위(五十二位)를 이룸에 지장을 주겠는가.

前之三師, 竝云頓悟, 故總以一頓悟斥之. 引經失旨, 其理自虧. 故知悟卽初住, 未悟卽住前. 旣許有悟與不悟, 何妨兩位俱有淺深, 乃成五十二位耶.

13695초주. 660의 주.
13696주전. 1201의 주.
13697승인함. 원문은 ‘許’.
13698양위. 별교․원교의 위계.

 [석첨] 셋째로 ‘究竟’ 아래서는 *경부(經部)에서 밝힌 것을 인용컨대 다 두 뜻이 있다고 했다. 어떻게 홀로 위계가 없다는 것으로 말을 삼아 될 일이겠는가.

三究竟下, 引經部所明, 皆有兩意. 如何獨以無以爲語.

13699경부. 경의 부류.

 [석첨] 최고의 대승이라면 화엄경․대집경․대품반야경․법화경․녈반경을 넘어섬이 없어서, 비록 법계가 평등하여 설할 것도 없으며 보일 것도 없음을 밝히고는 있다 해도, 보살의 수행의 위계는 끝내 명백히 나타나 있는 것이다.

究竟大乘, 無過華嚴大集大品法華涅槃. 雖明法界平等, 無說無示, 而菩薩行位, 終是炳然.

 [석첨] 다음으로 거듭 서술한 것 중에는 둘이 있으니, 먼저 서술하고, 다음에서는 논난(論難)했다.

次重述中二. 先述. 次難.

 [석첨] 또 어떤 사람은 말했다, ‘*평등법계(平等法界)에는 기필코 위계가 없을 것이다’라고.

又有人言. 平等法界, 定無次位.

13700평등법계. 절대평등한 진여. 법계에는 진리의 뜻이 있다.

 [석첨] 처음의 글에 대해 살피건대, 이 스님의 취지인즉 *다 같이 앞의 세 스님의 견해를 물리치는 터이므로 ‘기필코’라는 말을 세운 것이다.

初文者. 此師意者, 兼斥前之三師, 故立定言.

13701다 같이 앞의 세 스님의 견해를 물리침. 원문은 ‘兼斥前之三師’. 앞의 세 가지는 위계에 전후의 차례가 있음을 부정하면서도 위계가 없다고는 하지 않았으나, 이것은 위계 자체를 부인하는 견해다.

 [석첨] 다음으로 ‘今例’ 아래서는 *눈에 보이는 증거를 가지고 논난했다. 이것에 또 셋이 있으니, 먼저 권실(權實)의 두 증거를 바로 들고, 다음에서는 대지도론의 비유를 인용하고, 셋째로는 보현관경(普賢觀經)을 인용해 증명했다.

次今例下, 以見證爲難. 又三. 先正擧權實兩證. 次引大論譬. 三引普賢觀證.

13702눈에 보이는 증거. 원문은 ‘見證’. 경험으로 증명되는 일.

 [석첨] 이제 예를 들어가며 이 말에 대해 논난하겠다. 대저 *진제(眞諦)에는 분별이 있다 할 것인가. 진제에는 분별이 없다 할 것인가. 물론 진제에는 어떤 분별도 없다 해야 하려니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제를 본 사람에 있어서는 *칠현칠성(七賢七聖)과 *이십칠현성(二十七賢聖) 따위가 구별된 바 있었다. 그렇다면 이제 실상이 평등하여 비록 위계가 없다 한 대도, 실상을 본 사람에 대하여는 위계를 구별한다 해서 무슨 허물이 있겠는가.

今例難此語. 眞諦有分別耶. 眞諦無分別耶. 見眞之者, 判七賢七聖二十七賢聖等. 今實相平等, 雖無次位. 見實相者, 判次位何咎.

13703진제. 진리. 물론 소승의 진리를 가리키는 뜻으로 쓰인 말이다.
13704진리를 본 사람. 원문은 ‘見眞之者’. 진리 자체와 진리를 보는 사람을 구별한 것이니, 진리는 평등하다 해도 그 이해는 사람에 따라 차등이 생길 수 있음을 보이기 위해서다.
13705칠현칠성. 12029의 주.
13706이십칠현성. 사향사과(四向四果)의 성자를 27로 분류한 내용. (1)성실론(成實論)에서는, 예류향(豫流向)의 수신행(隨信行)․수법행(隨法行)․무상행(無相行)과, 예류과(豫流果)․일래향(一來向)․일래과(一來果)․불환향(不還向)․불환과(不還果)․아라한향(阿羅漢向)의 생(生)․무행(無行)․요혜(樂慧)․요정(樂定)․전세(轉世)․현발(現般)․신해(信解)․견득(見得)․신증(身證)을 유학십팔인(有學十八人)이라 하고, 여기에 아라한과(阿羅漢果)의 퇴법(退法)․수호(守護)․사(死)․주(住)․가진(可進)․불괴(不壞)․혜해탈(慧解脫)․구해탈(俱解脫)․불퇴(不退)를 이르는 무학구인(無學九人)을 합쳐 이십칠현성이라 하고, (2)구사론(俱舍論)에서는, 십팔유학(十八有學)인 예류향․예류과․일래향․일래과․불환향․불환과․아라한향․수신행․수법행․신해․견지(見至)․가가(家家)․일간(一間)․중발(中般)․생발(生般)․유행(有行)․무행(無行)․상류(上流)와, 구무학(九無學)인 퇴법(退法)․사법(思法)․호법(護法)․안주법(安住法)․감달법(堪達法)․부동(不動)․불퇴(不退)․혜해탈․구해탈을 그것이라 했다.

 [석첨] 글 그대로다.

如文.

 [석첨] 대지도론(大智度論)을 인용한 것 중에 둘이 있다. 먼저 인용했다.
 
引大論中二. 先引論.