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전법륜은 사성제를 설명한 것으로 이 초전법륜을 나타내는 부조에는 상징적 표현으로 법륜(바퀴)과 삼보(불 ․ 법 ․ 승)가 새겨져 있으며 동시에 실제적 모습인 다섯 비구와 신들의 예불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인간적 표현을 한 간다라 미술의 시작과 석가의 상징적 표현을 함께 볼 수 있기 때문에 이 초전법륜상은 대단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야사(耶舍)의 출가

부처님이 다섯 비구와 함께 녹야원에 머물러 계실 때, 어느 이른 아침 바루나 강변을 산책하고 계셨다. 그때 강 건너편 기슭에서 괴로움에 지쳐 마구 고함을 지르며 날뛰고 있는 한 젊은이를 발견하셨다. 그 젊은이는 바라니시에 살고 있는 장자의 아들 야사(耶舍)라는 청년이었다. 늦은 밤까지의 연회가 끝나고 모든 사람들이 깊은 잠에 빠져들었을 때, 뭔가 상서롭지 못한 꿈을 꾸게 된 야사는 이리저리 후원을 거닐고 있었다. 그때 그는 사랑하는 여인이 다른 남자와 함께 희롱하는 광경을 목격하게 되었다. 크나큰 충격을 받은 그는 연신 괴롭다는 말만 내뱉고 있었던 것이다. 부처님은 그에게 말씀하셨다. “그대, 청년이여. 내 그대에게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길을 가르쳐 주리라.” 오랫동안 부처님 말씀을 듣고 있던 야사의 마음속에는 차차 어두운 그림자가 벗겨져 가기 시작했다. 부처님이 설법을 마치시자 야사는 자리에서 일어나 말했다. “ 저도 부처님의 제자가 되게 해 주십시오.”
 이렇게 하여 부처님의 여섯 번째 제자가 된 야사도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그 후 아들을 찾아 부처님을 방문한 그의 아버지 역시 삼귀의 하여 최초의 재가신자가 되었다. 야사의 출가는 바라니시에 살고 있는 많은 상류층 자제들에게 큰 영향을 주어 야사의 친구 54명은 부처님 제자가 되었다. 그리고 일체 고(苦)의 속박으로부터 풀려난 채 해탈을 증득하였다.

전도 선언

부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가르쳐야 할 모든 것을 가르쳐 주셨다. 그러던 어느 날 60명의 제자가 모두 깨달음에 이르자 부처님께서는 그들 모두를 불러 모아 중대한 선언을 하셨다.
 “비구들이여, 너희들은 이미 정법을 듣고 해탈을 얻어 고뇌의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중생들은 아직도 세간의 고통 속에서 괴로워하고 있다. 그러므로 떠나라 비구들이여, 모든 중생들의 이익과 안락을 위하여. 그러나 같은 길을 두 사람이 함께 가지는 말아라. 각자 흩어져서 여러 곳을 돌면서 제도해야 할 사람을 제도하라. 세간에는 더럽혀지지 않은 많은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가르침을 받지 못하면 타락해 갈 것이지만, 가르침을 들으면 깨달아 아라한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카샤파 삼형제의 귀의

 그 후 부처님은 나란자강 근처에 사는 카샤파 삼형제를 교화하신다. 이 카샤파 삼형제의 교화는 매우 중요하다. 경전에 의하면 이 형제의 불교 귀의로 인하여 불교신자가 500명에서 3500명 정도로 새로 생겼다고 한다.
 신통력을 지닌 카샤파는 불의 신을 모시는 바라문 교도로 많은 신자를 거느리고 있었다. 부처님은 그에게 가서 하룻밤 묵기를 청하였으나 카샤파는 독룡(毒龍)이 나타나 위험하다며 거절하였다. 그러나 부처님께서 괜찮다며 계속 간청하자 허락을 한다. 이윽고 밤이 되자 독룡이 나와 부처님에게 불을 뿜으며 다가오자 부처님은 신통력으로 독룡을 꼼짝 못하게 한 후 잡아서 그릇에 넣어 카샤파에게 보여주셨다. 카라치 박물관에 있는 독룡의 제시는 매우 유명하며 간다라 미술의 사실적인 면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렇게 부처님은 꼭 필요할 때만 신통력을 발휘하며 교화 활동을 펴 나가셨다.

 카샤파 삼형제가 부처님 제자가 되었다는 소식은 곧 세상에 널리 퍼졌다. 그 소식을 전해들은 마가다국 빔비사라왕은 부처님께서 머물고 계시는 곳에 사신을 보내어 왕사성을 방문해 주실 것을 청하였고, 그 전갈을 받은 부처님께서는 곧 제자들을 이끌고 왕사성 가까운 숲에 이르셨다.
 부처님 일행이 다가오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빔비사라왕은 곧 신하들과 함께 부처님을 영접하기 위하여 숲으로 향했다. 환히 빛나는 부처님의 얼굴을 바라보자 빔비사라왕은 곧 부처님 발밑에 엎드려 큰 존경의 예를 올렸다. 이윽고 부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왕이시여, 나와 내 것이라는 생각을 여의십시오. 법에는 원래 ‘나’가 없는 것인데 범부는 나라고 보아 미혹함을 일으켜 끝없는 고통에 얽매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란 없다’는 이치를 통달할 것이며, 전도된 생각을 멀리할 것이니 이것이 해탈의 근본이 되는 것입니다.
물론 ‘나’라는 생각을 버린다는 것은 쉬운 일도 즐거운 일도 아닙니다. 그러나 ‘나’를 잊어버린 채 백성을 생각하고, ‘나’를 잊어버린 채 중생을 생각하며 그리하여 나도 중생도 잊어버림 속에서 마음에 걸림 없는 것을 얻게 된다면, 나의 마음은 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