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여광 원정의 귀로(구자에서 양주까지) 전호에 이어,

  라집이 군대가 산 밑에 숙영하려고 한 것을 안된다고 한 것은 일찍이 유소년 시절,

어머니와 함께 구자에서 귀빈까지 사막과 고산을 여행하며 얻은 경험과 신통력에

기초한 것이다.  여하튼 여광의 일행은 고생 끝에 겨우 고창에 다다랐다.

그러나 행로 중에 사정이 달라져 있었다. 비수의 전투에서 부견이 패했고, 장안 도읍까지의

연락이 두절되었으며, 양희가 지배하는 양주 일대는 독립하려는 기운이 강하였다.

이때 구자를 정복한 대군을 이끌고 귀환하는 여광군을 환영하는 측으로서는 그리 탐탁한

모습은 아니었다. 고창 태수는 이들이 자신의 영토를 지나는 것을 피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래서 태수 양한(楊翰)은 여광의 고창 입관에 앞서 성문을 닫고 이를 폐쇄시켜버릴까

어떨까를  빠른 말을 달려 고장에 있는 양주 자사 양희에게 의견을 구했다.

       여광, 그는 새로이 서역을 파하여 병탄하고 기백이 날카로워서 이제 그의 예봉을

       당해낼 수조차 없게 되었습니다. 그가 하는 일은 반드시 다른 의도가 있습니다.

       또 지금 관중을 혼란시키고 다음에는 경사(京師)의 존망을 알 수 없게 할 것입니다.

     하이(河已)의 서쪽에서 유사(流沙)까지 각 방으로 만 리나 되어 땅이 10만 리에 펼쳐져

     있습니다. 정립해 있는 위세가 실은 오늘에 위협이 되고 있습니다. 만약 여광이 유사를

     나오면 그의 세력은 측량할 수 없을 것입니다. 고오곡(高梧谷)의 입구는 요충지로 물의

     위험이 필요하다면 마땅히 이곳을 지키고 있다가 그 물을 뺏어버리십시오.

    저들이 그대로 기갈에 빠진다면 자연히 창을 던져버릴 것입니다.

     만약 이렇게 하여 멀리 쫓아버릴 수 있다면 이오(伊吾)의 관문도 또한 접근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진서』 符丕載記)

 양한은 여광이 유사를 나와서 하서에 들어온다면 자립할 수 있기 때문에 고오곡 또는

이오의 관문에서 저지하는 것이 어떨지 양희에게 묻는 내용이다. 그러나 양희는 문인으로

군사전략에 재능이 없었기 때문에 이 의견을 물리치고 강행 수단을 쓰기로 했다.

그래서 여광 일행의 고창 입관을 허락해버렸다.

그러나 이 군의 태수 양한은 입관을 허락했더라도 이곳에서 머무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태도를 보였다. 그렇다면 이곳을 여행할 수조차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이 여광군은 고창에서 옥문, 돈황에 이르러 양주자사 양희의 방해와 공격을

맞게 되었다. 양희는 우선 여광이 왕의 재가를 얻지 않고 귀환한 죄를 묻는다고 했다.

이에 대해 여광은 국난을 보고 달려가 나라를 구하는 정성도 없고, 또한 귀환하는 군병을

막는 죄가 크다고 응수했다. 결국 어려움을 무릅쓰고 진군하던 여광군은 양희의 아들

응양(鷹楊)장군 양윤(梁胤)의 5만과 주천(酒泉)에서 대결하게 되었다.
 
여기서 여광은 앞서 구자 공략에 공을 세웠던 팽황, 두진, 강비 등의 장군으로 선봉을 세우고,

감숙성, 주천현의 안미현에서 양윤군과 결전을 치렀다. 그 결과 양윤이 패하자, 지방의

호족들은 다시 여광의 위세를 평가하고 일제히 그를 따르게 되었다.

한편 양희가 있던 고장(姑臧)에서도 똑같이 그 지방 무위태수 팽제(彭濟)가 몰래 여광에

가담하여 양희를 잡아서 항복해왔다. 여광의 진영으로 보내진 양희는 결국 참살되었다.

마침내 385년 9월 여광 일행은 고장성에 들어가게 되었다. 비로소 여광 일행은 안도할 수

있는 곳으로 나올 수 있게 되었다.  라집도 물론 그들 중에 한 사람이었다.


 9. 양주 고장성의 번영

 여기서 양주(涼州) 특히 그 주의 수도였던 고장성(姑臧城)의 번영에 대해여 잠시 살펴보기로

한다. 중국 화북(華北)에는 오호십육국이 침입하여 분열과 항쟁의 사대를 맞고 있었다.

그 참혹한 모습에 대해여 『진서』 식화지(食貨志)에는 다음과 같이 진술하고 있다.

유(幽) 병(幷) 사(司) 기(冀) 진(秦) 옹(雍)의 여섯 주는 메뚜기 떼들이 극성해서 큰 피해를

입었다. 초목들과 소, 말까지 모두 사라졌다.

게다가 큰 전염병이 돌고 극심한 기근에 시달렸다. 백성들은 또한 도적들에게 약탈당하고

살해되었다. 집들이 떠내려가 강 속에 가득하고, 흰 뼈들이 들판에 널려 있다.

유요(劉曜)의 핍박을 받은 조정은 도읍을 창탄(倉坦)으로 옮길 것을 계획했다.

사람들은 대부분 모여서 식사하는데, 기아 질병으로 흩어져 버렸다.

백관들도 유랑민이 된 자가 열에 여덟, 아홉이었다.

이런 전란과 기근 속에서도 고장(姑臧)을 중심으로 한 양주 은 평화를 누린 별세계를

형성하였다. 『진서』 장식전(張寔傳)에는,

     진(秦) 옹(雍)의 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