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시 불교 경전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한때 쿠사바티의 어느 왕이 신하를 불러 그 나라에 사는 모든 장님을 초대하여 코끼리를 만
지게 한 후, 코끼리란 어떠한 것인가를 묻게 하라고 명하였다. 신하는 왕의 명대로 모든 장님   을 불러 잔치를 베푼 다음에 각자 코끼리를 만지게 하고 느낀 바를 물었다.
코끼리의 머리를 만진 장님은 코끼리는 항아리처럼 생겼다고 말하였다. 코끼리의 귀를 만진 장님은 코끼리는 키(箕)와 같다고 하였다. 코끼리의 이를 만진 장님은 쟁기의 끝처럼 생겼다고 하였다. 몸통을 만진 장님은 곡식창고 같다하고, 다리를 만진 장님은 기둥 같다고 하고, 등을 만진 장님은 맷돌 같다고 하고, 꼬리를 만진 장님은 빗자루처럼 생겼다고 하였다. 그 후, 장님들은 각기 자신의 설(說)을 주장하며 심하게 다투었다.
 
 사실 불교도 어떤 사람에 있어서는 철학이고 다른 사람에 있어서는 종교이거나 또는 수행 방법이기도 하다. 불교의 연기사상(緣起思想)에서 파생한 공(空)은 지성을 통한 논리적 사고로 이해되므로 철학이라 볼 수 있지만 이 철학이 영원한 진리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종교이고 그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에 있어서는 바른 생활이기도 하다. 어떠한 사상이건 그것은 이 세상에 있는 것의 극히 일부분을 보고 이끌어내는 편협한 판단이 서로 싸워 인류가 비참하게 사는 것을 부처님은 꿰뚫어 본 것이다.
 수많은 서로 다른 사실의 어느 하나를 가지고 편견에 사로잡혀 ‘이것만이 진리다’ 하고 외치는 것처럼 이 세상에 해롭고 위험한 것은 없다. 바울은 <로마인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십자가를 통해야만 인간은 구제된다고 역설했고 신학교에서는 이 가르침을 절대시하고 있다. 거기에도 구원은 있을는지 모르나 바울은 크게 잘못 생각한 것이다.
 카니시카 왕은 대승불교를 일으킨 훌륭한 왕으로 그의 카니시카 사리함에 새겨진 불상은 이 세상에 나온 최초의 불상이라고도 한다. 그는 제 4회 결집( 부처님의 가르침을 직접 청취한 제자들이 전체 회의라 할 수 있는 모임을 가진 것을 결집이라 함) 때, 최초로 불교 경전을 문자로 기록하였다. 당시는 바라몬교, 기독교, 유대교 등 여러 종교가 치열한 싸움을 벌이고 있을 때였는데, 카니시카 왕은 금화에 부처님을 새기고 그 밖의 여러 동전에는 자신은 불교도였지만 다른 종교의 신의 조각을 새겨 여러 종교가 각기 지니고 있는 좋은 점을 높이 평가하고 다른 종교도 육성하고 보호하였다.
 필자는 파키스탄의 라홀 박물관에 30여 차례 방문하였지만 2층에 즐비하게 전시되어 있는 여러 동전 가운데 카니시카 왕의 이러한 동전을 보고 또 보고 인류가 서로 다른 종교나 사상을 이해하고 서로 사랑하고 행복하게 살기 위해 지혜를 모으고 스스로 반성하여 더불어 발전을 꾀했던 카니시카 왕의 염(念)이 이 세상에 이루어져 세상에 전쟁이 사라져 사람들이 평화롭고 행복하게 살기를 바랬다. 카니시카 왕이 당시에 최초로 편집한 <법화경>에도 그 정신이 담겨 있다.
 부처님께서 가르치시는 달마(法)는 법률처럼 인간이 제정한 것은 아니다. 부처님은 세상을 떠나실 때 법을 근거로 살라고 하셨다. 그것은 극단적인 것이 들어가지 않은 하나의 그릇이다. 너무 많이 먹거나 아예 먹지 않는 것은 극단이다. 모든 것이 공(空)이지만 현상(現象)은 존재한다. 그 현상 속에서 삶을 영위하라는 것이다. 그것은 교의(敎義)가 아니다. 흔히 종교는 독특한 교의를 지니고 ~을 하라, ~을 하지 않으면 지옥에 간다, 모든 인간은 죄인이다 등등의 구체적인 가르침을 중심으로 하지만 부처님께선 독단과 테두리로 된 교의를 초월하라고 가르치신다. 본인 자신이 바른 행동을 하고 탐진치(貪瞋痴)를 벗어나기 위해 부처님이나 예수님 또는 마호메트의 가르침을 삶의 지침으로 삼고 평범한 인간이 구하는 부귀, 명예, 권력에 집착하지 않고 행복하게 사는 것이 중요하다.
 자기를 구제하는 것은 자기 자신이다. 자신이 자신의 몸과 마음을 가지고 자신의 길을 가야 하는 것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인 연기법만이 불도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하나의 인식철학에 불과한 무가치한 것이다. 선정과 같은 깊은 명상을 스스로 실천함으로써 마음의 편안함을 얻을 수 있다. 평소에 탐진치(貪瞋痴)에서 오는 모든 헤매임과 불안도 바른 생활을 통해 정진할 때 비로소 열반의 세계에 이르는 것이다.
 인간은 사회적인 법률, 조약, 계약, 윤리, 관습만으로는 살벌해서 이 세상을 절대로 살아갈 수가 없다. 홍수를 겪고 수많은 사람이 집을 잃고 헤매일 때 수많은 사람이 그곳에 가서 무상으로 노동력을 제공하고 수재민을 위로하고 힘을 주는 애정, 이러한 비사회적인 아름다운 것이 있기 때문에 인간은 서로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잘나고 권력 있고, 학식이 많다는 사회적인 평가에 우쭐거리는 인간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