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첨] 또 지(智)를 폐기하고 다시 지를 닦는 것과, 지를 폐기하지 않고 다시 지를 닦는 것과, 지를 폐기하고 지를 닦지 않는 것과, 지를 폐기하지 않고 지를 닦지 않는 경우가 있다.
 어떤 것이 지를 폐기하고 다시 지를 닦음인가. 삼장교의 보살이 자기의 지를 폐기하고 다시 *무생지(無生智)를 닦는 일이다. 어떤 것이 지를 폐기하지 않고 다시 지를 닦음인가. 주과(住果)의 성문이 자기의 지를 폐기하지 않은 채 *멀리 다시 *유관(遊觀)해 무생지를 배운대도, 실로 *교지(巧智)를 써서 번뇌를 끊음은 아닌 경우요, 또 *차제습(次第習)인 자가 이것이다. 어떤 것이 지를 폐기하지 않고 지를 닦지도 않음인가. 또한 주과의 성문으로 *멸도(滅度)의 상(想)을 낳아 대승을 닦으며 안함이니, *사제자(四弟子)가 *영해(領解)를 표시해 이르되,
 ‘*저희가 예전에 몸이 지쳐 다만 *공(空)과 무상(無相)․무원(無願)만 생각하고, *보살의 법은 전혀 바라는 마음 없었나이다.’
라 함과 같음이 이것이요, 및 *다시 후세의 기연(機緣)에 머무는 자가 이것이다. 어떤 것이 지를 폐기하고 지를 닦지 않음인가. 삼장교의 지를 폐기한 보살이 퇴전(退轉)해 여러 악을 저지르는 자가 이것이요, 또한 지를 폐기하고 나서 비밀리에 돈교(頓敎) 중에 들어가 방편지(方便智)를 닦지 않음이 이것이다.

又廢智更修智. 不廢智更修智. 廢智不修智. 不廢智不修智. 云何廢智更修智. 三藏菩薩, 廢己智, 更修無生智. 云何不廢智更修智. 住果聲聞, 不廢己智, 薳復遊關, 學無生智, 實不用巧智斷結也. 又次第習者是也. 云何不廢智不修智. 亦是住果聲聞, 生滅度想, 不肯修大也. 如四弟子領解云. 我昔身體疲懈, 但念空無相, 願於菩薩法, 都無願樂之心者是也. 及更逗後緣者是也. 云何廢智不修智. 廢三藏智菩薩, 退爲諸惡者是也. 亦是廢智已, 密入頓中, 不修方便智是也.

15058무생지. 4552의 주.
15059멀리. 원문은 ‘薳’. 원(遠)과 음이 같으므로 통용되는 글자다.
15060유관. 각처를 나가 다니면서 인생의 진실에 눈뜨는 일. 부처님이 태자 시절 네 성문 밖에 나가셨다가 생․노․병․사의 고(苦)를 목격하신 체험을 사문유관(四門遊觀)이라 하는 따위. 15061교지. 뛰어난 대승의 지혜. 2828의 ‘巧度’의 주 참조.
15062차제습. 가르침을 순서대로 배워가는 일. 곧 삼장교를 닦아 마치지도 않은 처지에서 통교를 배우고, 또 같은 태도로 별교․원교도 배우려 하는 것.
15063멸도의 상. 원문은 ‘滅度想’. 795의 주.
15064사제자. 비유품의 화택비유를 듣고야 개권현실의 도리를 이해한 네 명의 불제자. 곧 수보리․가전연․가섭․목건련.
15065영해. 가르침을 듣고 나서 이해하는 일. 비유품이 비설주(譬說周)의 정설(正說)인데 대해 신해품은 그 영해에 해당한다.
15066저희가……. 원문은 ‘我……’. 이하는 신해품에서 四제자가 영해를 고백하는 글의 인용인데, 원문 그대로는 아니다.
15067공과 무상․무원. 원문은 ‘空無相願’. 無相願에서 無는 相과 願을 다 같이 제약하니 ‘無相․無願’의 뜻. 경에서는 無相이 2476의 ‘三三昧門’의 주.
15068보살의 법은 전혀 바라는 마음 없었나이다. 원문은 ‘於菩薩法, 都無願樂之心’. 경에서는 ‘於菩薩法, 遊戱神通, 淨佛國土, 成就衆生, 心不喜樂’로 하고 있다.
15069다시 후세의 기연에 머물음. 원문은 ‘更逗後緣’. 후세의 어울리는 자질을 지닌 중생에게 남겨 두어 이익을 주려 하는 것. 경우에는 후인을 위해 머물러 두므로 지는 폐기되지 않고, 후인이 이를 활용하지 못할 때는 닦지도 않는 결과가 온다.

 [석첨] 다음으로 지(智)를 폐기하는 사구(四句) 중에서, 초구(初句)는 *또한 삼보살(三菩薩)에도 통한다.
 둘째로 지를 폐기하지 않으면서 다시 지를 닦는 중에서 ‘또 차제습(次第習)인 자가 이것이다’라 말한 것에 대해 살피건대, 무릇 폐기라 말하는 것은 만약 법화경 이전이라면 혹은 *방편의 위계를 폐기하여 방편에 들어가기도 하고 진실에 들어가기도 하며, *방편을 폐기하여 진실에 들기도 하며, *높음을 폐기하여 낮은 데로 돌아오기도 하고, 만약 차례를 따라 수행하는 사람이라면 *초발심(初發心)으로부터 *본디 차례대로 배우고자해 얕은 데에서 깊은 데로 *오르니, 어찌 얕은 것을 폐기하고 깊은 데로 들어감을 기다리겠는가.
 제삼구(第三句)는 *삼교(三敎)의 보살은 이를 결여하고 있을 것이니, 또한 법화경 이전에 의거하고 있으므로 *방등시(方等時)의 글의 취지를 인용해 증명한 것이다. 후세의 기연에 머문다 함은, 사람이 비록 닦지 않는다 해도 다시 후세를 위해 머물러 두어야 하는 것이다.
 제사구(第四句)는 *사교(四敎)의 초심(初心)에는 다 이 뜻이 있을 것이나 *잠시 삼장교의 사상(事相)의 편의에 입각해 논한 것뿐이다.

次廢智四句中. 初句者, 亦通三菩薩. 次不廢智更修智中, 云又次第習者是也者. 凡云廢者, 若法華前, 或廢權位入權入實, 廢權入實, 廢高歸下. 若次第習者, 從初發心, 本擬次第, 自淺階深, 何待廢淺而入深也. 第三句者, 三敎菩薩觀之. 亦據法華前, 故引方等時文意證也. 言逗後者, 人雖不修, 更修逗後. 第四句者, 四敎初心, 竝有此義, 且約三藏事相便耳.

15070또한 삼보살에도 통함. 원문은 ‘亦通三菩薩’. 통교․별교의 보살에도 보다 높은 가르침의 지혜로 옮아감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15071방편의 위계를 폐기하여 방편에 들기도 하고 진실에 들기도 함. 원문은 ‘廢權位入權入實’. 별접통(別接通)은 보다 높은 방편의 가르침에 들어감이요, 원접통(願接通)은 진실의 가르침에 들어감이다.
15072방편을 폐기하여 진실에 들어감. 원문은 ‘廢權入實’. 원접별(圓接別)의 경우다.
15073높음을 폐기하여 낮은 데로 돌아옴. 원문은 ‘廢高歸下’. 별교의 십지(十地)가 원교의 십주(十住)가 되는 따위가 그것이다.
15074초발심. 1566의 ‘初發心者’의 주.
15075본디 차례대로 배우고자 함. 원문은 ‘本擬次第’. 전후의 가르침을 두루 배우려는 태도를 지녔다는 것.
15076오름. 원문은 ‘階’. 계단을 오르듯 순서를 따라 오르는 뜻의 동사.
15077삼교의 보살은 이를 결여하고 있음. 원문은 ‘三敎菩薩觀之’. 깨달음에 주저앉아 멸도상을 일으킴은 성문의 태도일 뿐, 보살에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삼교는 삼장교․통교․별교. 15078방등시의 글. 원문은 ‘方等時文’. 법화경의 인용문은 성문의 처지에서 대승의 설법을 듣고 기뻐하지 않는 취지이므로, 방등시의 설법이다.
15079사교의 초심에는 다 이 뜻이 있을 것임. 원문은 ‘四敎初心, 竝有此義’. 지를 폐기하고 퇴전함은 사교의 초심에는 다 있을 수 있는 현상이라는 것.
15080잠시 삼장교의 사상의 편의에 입각해 논한 것뿐임. 원문은 ‘且約三藏事相便耳’. 전혀 진리를 이해하지 못한 채 퇴전함을 나타내는 데는 삼장교의 초심이 예로 들기에 안성맞춤이라는 뜻. 사상(事相)은 작용의 모습.

 [석첨] 또 위계(位階)를 폐기하고 다시 위계에 드는 것과, 위계를 폐기하고 위계에 들지 않는 것과 위계를 폐기하지도 않고 다시 위계에 들지도 않는 것과, 위계를 폐기하지 않으면서 위계에 드는 것이 있다.
 어떤 것이 위계를 폐기하고 다시 위계에 드는 일인가. 삼장교의 보살이 *부단혹(不斷惑)의 위계를 폐기하고 단혹(斷惑)의 위계로 들어감이 이것이다.
 어떤 것이 위계를 폐기하고 다시는 위계에 들지 않음인가. 위계를 폐기하고 *비밀리에 돈교(頓敎)를 깨달은 자가 *차제위(次第位)에 들지 않음이 이것이다.
 어떤 것이 위계를 폐기하지도 않고 다시 위계에 들지도 않음인가. *주과(住果)의 이승(二乘)이 이것이다.
 어떤 것이 위계를 폐기하지 않으면서 다시 위계에 들어감인가. *후일의 기연(機緣)에 머무는 탓에 이익을 받는 자요, 또 *비밀리의 깨달음을 폐기하지 않은 채 위의 위계에 들어감이 이것이다.
 통교․별교의 지(智)․위(位)의 요간(料簡) 또한 응당 이러한 것이다…….

又廢位更入位. 廢位不入位. 不廢不更入. 不廢而入. 云何廢位更入位. 三藏菩薩, 廢不斷惑位, 入斷惑位. 云何廢位不更入位. 謂廢位密悟頓者, 不入次第位也. 云何不廢位不更入位. 住果二乘也. 云何不廢位更入位. 謂逗後緣者. 亦是未廢密悟而入上位也. 通敎別敎智位料簡, 亦應如此云云.

15081부단혹의 위계를 폐기하고 단혹의 위계로 들어감. 원문은 ‘廢不斷惑位, 入斷惑位’. 삼장교의 위계에서 위의 가르침의 위계로 들어가는 일. 삼장교의 보살은 번뇌를 억제할 뿐 끊지 않으니, 이를 복혹행인(伏惑行因)이라 한다. 번뇌를 끊으면 다시 태어날 수 없어서 중생을 제도할 수 없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번뇌를 끊는 수행은 통교 이후에서야 이루어지는 것이다.
15082비밀리에 돈교를 깨달은 자. 원문은 ‘密悟頓者’. 삼장교가 설해지는 자리에서 바로 원교를 깨달은 사람. 이 돈(頓)은 원돈(圓頓)의 뜻이니, 법화경의 원교를 이른다.
15083차제위. 순서적인 위계. 통교․별교의 위계.
15084주과. 깨달음에 머무는 것.
15085후일의 기연에 머무는 탓에 이익을 받는 자. 원문은 ‘逗後緣者’. 결집된 경전에 의거해 후세에서 수행해 위계에 드는 사람.
15086비밀리의 깨달음을 폐기하지 않은 채 위의 위계에 들어감. 원문은 ‘未廢密悟而入上位’. 삼장교 때 비밀리에 원교를 깨달은 자가, 법화경의 개권현실의 가르침을 받아들여 원교의 위계에 드는 일이다.

 [석첨] ‘통교’에서 ‘이러할 것이다’에 이르는 글에 대해 살피건대, *통교에는 삼승(三乘)이 있으니 그러므로 요간(料簡)한 결과는 전적으로 삼장교와 동일해진다. *별교는 오직 보살뿐이므로, 앞에서 ‘교(敎)를 폐기하고 다시 교를 듣지 않는다’고 밝힌 *이 구(句)는 전적으로 빠져 있다고 보아야 하니, 이제 ‘위계를 폐기하지 않은 채 다시 위계에 든다’고 구는 이승(二乘) 쪽이 빠져 있는 것이 된다. 이로 말미암아 별교가 차례로 위계에 들 것임은 그 도리로 보아 의당 그러할 것이다.

通敎至如此者. 通有三乘, 是故料簡全同三藏. 別唯菩薩, 故前明廢敎不更聞敎, 此句全關. 今不廢位而更入位句. 關二乘邊. 由此別敎, 次第入位, 其義可然.

15087통교에는 삼승이 있음. 원문은 ‘通有三乘’. 삼승이 있는 점은 통교와 삼장교가 같다는 것.
15088별교는 오직 보살뿐임. 원문은 ‘別唯菩薩’. 보살만의 가르침이 별교다.
15089이 구는 전적으로 빠져 있다고 보아야 함. 원문은 ‘此句全關’. 앞의 폐교(廢敎)의 글에서 ‘교를 폐기하고 다시 교를 듣지 않는다’는 구(句)는, ‘주과(住果)의 이승(二乘)이 교를 폐기하고 나서 멸도에 들어감과 같다’고 설해진 바 있으니, 그러므로 별교의 보살에는 이 구가 해당됨이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