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첨] *아래의 글에서 이른 것과 같다.
 ‘*성문․연각이 대숲 같다 해도, *신발의(新發意)․불퇴전(不退轉)의 보살 따위라 해도 다 알지 못하니,

如下文云. 聲聞緣覺如竹林, 新發不退菩薩等, 皆不能知.

15369아래의 글. 원문은 ‘下文’. 방편품에 여섯 게송이 있는 중, 그 첫 게송의 인용이다. 다만 그 내용을 개략적으로 소개한 것뿐이어서, 정확한 인용은 아니다.
15370성문․연각의 대숲 같다 해도. 원문은 ‘聲聞緣覺如竹林’. 게송에서 ‘假使滿世間, 皆如舍利弗. 盡思共度量, 不能測佛智. 正使滿十方, 皆如舍利弗, 反餘諸弟子, 亦滿十方利. 盡思共度量, 亦復不能知. 辟支佛利智, 無滿最後身, 亦滿十方界, 其數如竹林. 斯等共一心, 於億無量劫, 欲思佛實智, 莫能知少分’의 취의(取意)다.
15371신발의․불퇴전의 보살 따위라 해도 다 알지 못하니. 원문은 ‘新發不退菩薩等, 皆不能知’. 이것도 ‘新發意菩薩, 供養無數佛, 了達諸義趣, 又能善說法, 如稱麻竹葦, 充滿十方刹. 一心以妙智, 於恒河沙劫, 咸皆共思量, 不能知佛智. 不退諸菩薩, 其數如恒沙, 一心共思求, 亦復不能知’의 취의다. ‘신발의’는 새로 보리심을 일으키는 것.

 [석첨] 다음으로는 바로 능히 아는 것을 밝히니, 곧 사위(似位)의 시종(始終)이다. *오품(五品)은 처음이요 *육근(六根)은 끝이라 본 것이다.

次正明能知, 卽似位始終. 五品始, 六根終.

15372오품. 오품제자위(五品弟子位)니, 곧 원교의 외범(外凡)이다.
15373육근. 육근청정위(六根淸淨位)니, 곧 원교의 십신(十信)이다.

 [석첨] ‘모든 보살들 중 신심의 힘이
 견고한 자만이 예외가 되느니라.’
 위의 글을 살피건대 ‘성문․연각으로는 능히 알지 못한다’ 함은, 이는 삼장교․통교의 두 가지 이승(二乘)을 구별한 것이다. 삼장교의 보살은 *진리를 인식함이 성문에 못 미치는데, 성문도 알지 못한다면 이 보살이 어찌 알 수 있겠는가.
 통교의 보살은 진리의 드는 지혜가 이승과 다르지 않은데, 이승도 알지 못한다면 저 보살도 알지 못할 것은 뻔하니, 이제 이승의 알지 못함을 나타내 보인 바에는 *두 곳의 보살 또한 헤아리지 못함이 된다.
 ‘발심한 보살도 알지 못한다’ 함은 곧 별교의 십신(十信)을 가리킨다. 또 ‘불퇴전의 보살도 알지 못한다’ 함은 곧 별교의 *삼십심(三十心)을 가리킨다. 십주(十住)는 *위불퇴(位不退)요, 십행(十行)은 *행불퇴(行不退)요, 십회향(十廻向)은 *염불퇴(念不退)니, 이 세 가지 불퇴에 이른 보살도 다 알지 못하는 것이다. 삼장교 중의 불퇴의 보살은 이승에도 못 미치고, 통교 중의 불퇴의 보살은 다만 이승과 같을 뿐이므로, 이승이 알지 못한다 하면 족한 것이어서 어찌 거듭 보살을 들 필요가 있었겠는가. 그러므로 이제 발심과 불퇴를 나타내 보인 것은 별교 중의 사람을 나타내려 한 것이다. 그리고 ‘신심의 힘’이란 *가명위(假名位)요, ‘견고하다’란 *철륜위(鐵輪位)다. 이 같은 따위의 위계는 경을 들어 곧 이해했기에, 그러므로 묘일 수 있는 것이어서, 사위(似位)의 처음이다.

 除諸菩薩衆, 信心堅固者.
 聲聞緣覺所不能知. 此簡三藏通敎, 量種二乘也. 三藏菩薩, 緣眞不反聲聞. 聲聞尙不知, 此菩薩那得知. 通敎菩薩入眞之智, 與二乘不殊. 二乘不知, 彼菩薩亦不知. 今標二乘不知, 兩處菩薩, 亦不能測. 發心不知, 卽指別敎十信. 不退不能知, 卽指別敎三十心. 十住位不退, 十行行不退, 十廻向念不退. 此三不退, 皆不能知. 三藏中不退, 尙不反二乘. 通敎中不退, 止等二乘. 二乘不豈重擧菩薩. 今標發心不退者, 則擬別敎中人也. 信歷者, 是假名位. 堅固者, 是鐵輪位. 如此等位, 聞經卽解, 故得爲妙, 似位之始也.

15374진리를 인식함이 성문에 못 미침. 원문은 ‘緣眞不反聲聞’. 성문이 번뇌를 끊어 깨달음을 이루는 것에 전념하는 데 비해, 삼장교의 보살은 대중의 구제에 노력하여 그런 일은 소홀히 하기 때문이다.
15375두 곳의 보살. 원문은 ‘兩處菩薩’. 삼장교의 보살과 통교의 보살.
15376삼십심. 십주․십행․십회향.
15377위불퇴. 십주의 보살이 견사혹을 깨어 길이 이 위계로부터 퇴전하지 않게 되는 일. 삼불퇴(三不退)의 하나.
15378행불퇴. 진사혹을 억제하고 끊어 길이 화타행(化他行)에서 퇴전하지 않게 되는 일. 십행의 불퇴다. 삼불퇴의 하나.
15379염불퇴. 십회향의 보살이 중도의 정념(正念)에 안주하여 공가(空假)의 변견(邊見)에서 퇴전하지 않게 되는 일. 삼불퇴의 하나.
15380가명위. 오품제자위를 가리키니, 원교의 외범이다. 관행(觀行)은 있으나 깨달음은 없기 때문이다.
15381철륜위. 12605의 주.

 [석첨] 해석 중에서 또한 잠시 알지 못하는 부류들을 해석하여, *그 아는 부류는 예외로 돌린 것은 그것으로 알지 못하는 부류를 드러내려 한 것이다. 그러므로 예외로 돌려진 것은 곧 사위(似位)다.

釋中亦且釋不知等, 除其所知, 以顯不知. 是故所除, 卽似位也.

15382그 아는 부류는 예외로 돌림. 원문은 ‘除其所知’. 경에서 ‘모든 보살들 중 신심의 힘이 견고한 자만은 예외다’ 하신 것을 가리킨다.

 [석첨] 다음으로 ‘開’ 아래는 진위(眞位)의 시종이다.

次開下, 眞位始終.

 [석첨] 처음으로 *부처님의 지견(知見)을 열어, *이 보승(寶乘)을 타고 동방(東方)에 노닐음은 곧 진위(眞位)의 처음이요, 삼방(三方)은 중간의 위계요, *바로 도량(道場)에 이르러, *다(茶)를 지나가 글자의 설할 것이 없어짐을 곧 끝의 위계다.

初開佛知見, 乘是寶乘, 遊於東方, 卽是眞位之始也. 三方是中位. 直至道場, 過茶無字可說, 卽是終位也.

15383부처님의 지견을 열다. 원문은 ‘開佛知見’. 658의 ‘開示悟入’의 주 참조.
15384이 보승을 타고 동방에 노닐음. 원문은 ‘乘是寶乘, 遊於東方’. 비유품의 게송의 인용인데, 東方은 원문은 ‘四方’을 동방과 삼방으로 바꾸어, 그것으로 진위(眞位)의 처음과 중간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고 있다.
15385바로 도량에 이르름. 원문은 ‘直至道場’. 비유품에는 ‘乘是寶乘’과 같은 뜻의 ‘乘此寶乘’이라는 표현이 있고, 그것에 이어 ‘直至道場’이라는 말이 나온다. 바로 원교의 깨달음을 성취하는 일. ‘도량’에 대하여는 1124의 주.
15386다. 앞의 사십이자문에서 밝혔듯, ‘다’는 구경(究竟)의 위계를 비유한다.

 [석첨] 다음으로 탈것을 밝히는 중에 둘이 있으니, 먼저 탈것의 동일하지 않음을 밝히고, 둘째로는 행하는 것의 동일하지 않음을 밝혔다.
 처음의 글에 넷이 있으니, 처음에서는 간략히 표방했다.

次明所乘中二. 先所乘不同. 次所行不同. 初文四. 初略標.

 [석첨] 이 같은 여러 위계는 어떤 탈것을 타는 것이랴.

如此諸位, 乘何等乘.

 [석첨] 둘째로 ‘乘有’ 아래에서는 해석했다.

次乘有下, 釋.

 [석첨] *탈것에는 세 종류가 있으니, *교(敎)․행(行)․증(證)을 이른다.

乘有三種, 謂敎行證.

15387탈 것. 원문은 ‘乘’. 탈것이 먼 곳까지 사람을 실어나르는 것같이, 깨달음에 이르게 하는 방법․수단이 되는 것을 ‘승’이라 한다. 보통은 교(가르침)를 가리킨다. 여기서는 ‘행’과 ‘증’까지도 추가해 쓰고 있다.
15388교․행․증. 부처님의 가르침과, 그 가르침에 의한 수행과, 그 수행에 의해 얻어지는 깨달음.

 [석첨] 셋째로 ‘若言’ 아래서는 탈것의 이르는 바가 동일하지 않음을 해석했다.

三若言下, 釋乘所至不同.

 [석첨] 만약 ‘*이 탈것(乘)이 삼계(三界)로부터 나가 살바야(薩婆若) 중에 이르러 머무른다’고 말씀하신다면, 이 머무름에는 두 뜻이 있음이 된다. 첫째인 깨달음에 집착하는 까닭에 머무르는 경우니, 곧 통교의 취지요, 둘째는 탈것이 극에 이르렀으므로 머무르는 경우니, 곧 별교․원교의 취지다.

若言是乘從三界出, 到薩婆若中住. 住有二義. 一取證故住, 卽通敎意也. 二所乘極故住, 卽別圓意也.

15389이 탈 것이 삼계로부터 나가 살바야 중에 이르러 머무름. 원문은 ‘是乘從三界出, 到薩婆若中住’. 대반야경의 출도품(出到品)의 글인데, 대지도론 五0에 인용되어 있다. ‘살바야’는 일체지(一切智).

 [석첨] 넷째로 ‘初心’ 아래서는 바로 *원교의 탈것의 세 상(相)이 동일치 않음을 밝히니, *오품(五品)은 교(敎)를 타고 *육근(六根)에 이르며, 육근은 행(行)을 타고 *초주(初住)에 이르며, 초주는 증(證)을 타고 *묘각(妙覺)에 이름이 그것이다.
 처음의 ‘初心’ 아래는 먼저 표방함이요, ‘我圓敎’ 아래는 맺은 말이다.
*아래의 둘도 그렇다.

四初心下, 正明圓乘三相不同. 五品乘敎至六根. 六根乘行至初住. 初住乘證至妙覺. 初初心下, 前標. 我圓敎下, 結. 下二亦爾.

15390원교의 탈것. 원문은 ‘圓乘’ 원교의 실천법. 원교.
15391오품. 3155의 ‘五品弟子位’의 주.
15392육근. 7906의 ‘六根淸淨’의 주.
15393초주. 660의 주.
15394묘각. 370의 주.
15395아래의 둘. 원문은 ‘下二’. 육근이 행을 타고 초주에 이르는 것과, 초주가 증을 타고 묘각에 이르는 일.

 [석첨] *초심(初心)에서도 가르침(敎)의 *소전(所詮)에 의지해 가르침을 믿고 행(行)을 세워서 삼계로부터 벗어날 수는 있다. 그러나 *무명을 아직 깨지 못했기에 깨달음이 있지 못하니, 그러므로 진리를 보지 못한 채, 다만 *가르침의 탈것을 타고, 여기에 이른 것뿐이다. 우리 원교 중에서 누구가 이것이랴. *오품제자(五品弟子)로 능히 잘 *대심(大心)을 발하여 길이 삼계의 *고륜해(苦輪海)와 헤어진 것이, 곧 그 사람이다. 또 가르침의 탈것은 이미 그쳤으나 깨달음의 탈것에는 미치지 못해, *사해(似解)의 지혜로써 나아가 *중행(衆行)을 닦음은 곧 *행(行)으로 탈것을 삼음인데, 이런 이는 *방편의 삼계 중에서 벗어나 초주(初住)의 *살바야(薩婆若) 중에 이르러 머무른다. 우리 원교 중에서 누구가 이것이랴. *십신심(十信心)의 육근청정(六根淸淨)한 자가 곧 그 사람이다. 그리고 초주 내지 등각(等覺)으로 다시 *증도손생(增道損生)하는 자는 *깨달음으로 탈것을 삼아, *인연의 삼계와 내지는 무후(無後)의 삼계 중으로부터 벗어나 묘각(妙覺) 중에 이르러, 다(茶)를 지나 글자의 설할 것이 없게 되니, 그러므로 살바야 중에 이르러 머무른다고 말한다. 전부터의 여러 탈것은 아직 그 위의 법이 있으므로 머무른다고 일컬을 수 없겠으나, 다(茶)는 그보다는 위의 것이 없는 법이매, 그러므로 머무른다 말하는 것이어서, 머무름 없는 곳에 머무르는 것이 곧 묘위(妙位)의 끝이다.
 또 다음으로 별교의 십주(十住)에서 *견사혹(見思惑)을 깸은 *삼백유순(三百由旬)을 감이요, 십행(十行)에서 *진사혹(塵沙惑)을 깸은 사백유순(四百由旬)을 감이라 하고, 십회향(十廻向)에서 *무명혹(無明惑)을 억제함은 오백유순(五百由旬)을 감이라 하고, 십지(十地)에서 무명혹을 깨는 것, 이는 부분적으로 중도(中道)를 봄이니 곧 *보소(寶所)라 한다. 원교의 육근청정(六根淸淨)일 때는 四백유순을 감이요, 무명혹을 깨어 초주(初住)에 들어감은 五백유순을 감이요, 이승(二乘)이 경을 들어 무명혹을 깨고 부처님의 지견(知見)을 여는 것에 의해 *기(記)를 얻어 작불(作佛)함은, 곧 *온갖 추위(麤位)를 결료(決了)함으로써 五백유순을 지나 와서 초주에 드는 일이니, 곧 묘위의 처음이어서 깨달음의 탈것을 얻어 동방(東方)에 노닐음이다. 만약 *본문(本門)중에 이르러 증도손생하고, 다시 깨달음의 탈것을 타고 남방(南方)에 노닌다면, 나아가 십행에 들어감이요, 서방(西方)에 노닐음은 나아가 십회향에 들어감이요, 북방(北方)에 노닐음은 나아가 십지에 들어가는 일이다.

初心憑敎所詮, 信敎立行, 得出三界. 無明未破, 未有所證, 故不見眞. 但乘敎乘, 來至此耳. 我圓敎中, 其誰是耶. 謂五品弟子, 能善發大心, 長別三界苦輪海, 卽其人也. 敎乘旣息, 證乘未及. 以似解慧, 進修衆行, 則以行爲乘, 從方便三界中出, 到初住薩婆若中住. 我圓敎中, 其誰是耶. 謂十信心六根淸淨者, 卽其人也. 初住乃至等覺, 更增道損生者. 此以證爲乘, 從因緣三界, 乃至無後三界中出, 到妙覺中, 過茶無字可說, 故言到薩婆若中住. 前來諸住. 住無住處, 卽妙位之終.
復次別敎十住破見思, 是行三百由旬. 十行破塵沙爲四百. 十廻向伏無明爲五百. 十地斷無明, 此分見中道, 卽爲寶所也. 圓敎六根淸淨時, 是行四百. 破無明入初住, 是行五百. 二乘聞經, 破無明惑, 開佛知見, 得記作佛者. 卽是決了諸麤位, 過五百由旬, 來入初住, 卽是妙位之始, 得於證乘, 遊於東方也. 若至本門中增道損生, 更乘證乘, 遊於南方, 是進入十行位也. 西方是進入十廻向. 北方是進入十地也.

15396초심. 3064의 주.
15397소전. 경전의 문구[能詮]에 의해 표현된 도리를 소전이라 한다.
15398무명. 삼혹(三惑)의 하나인 무명혹.
15399가르침의 탈것. 원문은 ‘敎乘’. 탈것에는 교(敎)․행(行)․증(證)의 세 종류가 있다고, 앞에서 밝혀진 바 있다.
15400오품제자. 3155의 주.
15401대심. 대승의 깨달음을 구하는 마음. 대보리심.
15402고륜해. 생사의 고가 수레바퀴처럼 끝없이 이어짐을 바다에 비유한 말. 윤회의 바다. 15403사해의 지혜. 원문은 ‘似解慧’. 원교의 십신의 보살은 육근이 청정해져서 대경(對境)에 대한 즉공(卽空)․즉가(卽假)․즉중(卽中)의 삼관(三觀)이 더욱 밝아지는데, 그것은 초주(初住) 이상의 깨달음과 비슷하므로 ‘사해의 지혜’라 하는 것.
15404중행. 여러 수행.
15405행으로 탈것을 삼음. 원문은 ‘以行爲乘’. 행의 탈것[行乘]이라는 뜻.
15406방편의 삼계. 원문은 ‘方便三界’. 방편이라 함은 사토(四土) 중의 방편유여토(方便有餘土). 그런데 견사혹을 끊어 삼계에서 벗어난 자가 머무르는 곳이 방편유여토라면, ‘방편의 삼계’라는 말은 모순이라고도 받아들여질 여지가 있다. 그러나 소승에서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견사혹은 간단히 끊어지는 것이 아니어서, 등각 이하에도 그 질이 다르긴 해도 여전히 남아 있고, 따라서 삼계가 있다는 것이 천태대사의 견해다. 등각은 견혹을 떠나 묘각이 되어야 하는데 견혹이 없다면 무엇을 다시 깨달으며, 사혹이 끊어졌다면 다시 선정을 닦아 묘각의 과보도 받을 수 없지 않겠는가. 이것은 권오(卷五)의 상(上)에서 이미 밝혀진 바 있다.
15407살바야. 일체지(一切智).
15408십신심의 육근청정. 원문은 ‘十信心六根淸淨’. 십신심은 십신. 원교에서는 십신을 육근청정위라고도 하므로 둘은 같은 말이다.
15409증도손생. 366의 주.
15410깨달음으로 탈것을 삼음. 원문은 ‘以證爲乘’. 탈것[乘]에 세 종류가 있는 중의 증승(證乘)이다.
15411인연의 삼계와 내지는 무후의 삼계. 원문은 ‘因緣三界乃至無後三界’. 섭대승론(攝大乘論)에서 세운 칠종생사(七種生死) 중의, 다섯째인 인연생사와 여섯째인 유후생사(有後生死)와 일곱째인 무후생사(無後生死)를 이른다. 인연생사란 초지 이후의 여러 위계에서 불가사의한 이(理)를 인(因)으로 하고 무루의 지(智)를 연(緣)으로 하여 무명의 대부분을 깬 다음, 다시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생사를 나타내는 일. 유후생사는 제십지(第十地)의 보살이 일품(一品)의 무명혹을 남겨놓고 있기 때문에 나타내는 생사. 무후생사는 등각이 마지막 무명을 깨어 묘각의 위계에 드는 것에 의해 다시는 후신(後身)을 받지 않게 되는 일. 이 셋은 다 실보토(實報土)의 생사인데, 천태대사는 이들 또한 견혹․사혹을 지니고 있다 해석하여 계외(界外)의 삼계에 속한다 한 것이다.
15412견사혹. 원문은 ‘見思’. 삼혹(三惑) 중의 그것이니, 457의 ‘障中道微細無明’의 주 참조.
15413삼백유순. 화성유품의 비유에서 ‘오백유순의 험난한 길을 지나 보소(寶所)에 이르려 한다’고 한 그것. 이것에 대해 천태대사는 삼계의 과보가 있는 곳을 三백유순이라 하고, 유여토(有餘土)를 四백유순, 실보토(實報土)를 五백유순이라 해석했다. “법화문구” 참조.
15414진사혹. 앞의 457의 주 참조.
15415무명혹. 원문은 ‘無明’. 앞의 457의 주.
15416보소. 보배가 있는 곳. 431의 ‘托寶所而論極’의 주.
15417기를 얻어 작불함. 원문은 ‘得記作佛’. 부처님으로부터 성불하리라는 예언을 들어 마침내 부처님이 되는 일.
15418온갖 추위를 결료함. 원문은 ‘決了諸麤位’. 방편의 가르침의 모든 위계의 정체를 분명히 아는 일. 곧 그것이 원교임을 아는 일.
15419본문. 482의 ‘本迹’의 주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