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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기2549년 07월 - 조사 큰스님 28주기 - 행산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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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영산법화사 댓글 0건 조회 4,687회 작성일 19-08-23 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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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사 큰스님 28주기

                                                                                                                                     행산 합장

나무묘법연화경
큰스님께 여쭙습니다.
염원하시던 세계평화불사리탑의 건립은 작년 11월 중순에 추위로 인한 공사 부실을 막기 위해서  중단했습니다.  금년 을유乙酉년에 접어들면서 먼저 상륜相輪을 4월 2일 태성불교의 박용담씨와 1억 7천5백만 원에 계약했습니다. 
공사진행은 무애거사 후임으로 묘관행불자님의 자재인 이규봉불자 께서 현장소장으로와서 도와주고있습니다. 공사는 3월 20일부터 시작했는데 불사리탑 주변 조경과 밭을 정리하기 위하여 나무를 분을 떠서 옮겨 심었습니다.  주변 일부의 기존 나무는 베어내고 그 자리에 전나무와 소나무, 오엽송 등을 심었습니다. 자연석을 쌓은 곳에는  회양목, 철쭉 등을 심어 조경을 하였습니다.  벌목한 데서 참나무가 나왔고 그 중에는 표고목으로 쓸 만한 것도 상당히 나와서 표고버섯도 심었습니다.  두 달 열흘 동안 지루하고 신경 쓰이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는 중에 4월 20일부터 세계평화불사리탑 건립 본공사를 재개해서 작업 진행을 위한 발판 설치 공사를 시작으로 마지막 돔=복발(伏鉢; 바루를 업어놓은 모양의 반원형)에 철판을 연결하고 5월10일 콘크리트를 쳤습니다. 평두平頭(돔 위의 사각형)를 형틀로 조립하여 5월31일 콘크리트를 쳤습니다  그리고 6월 6일 상량上樑을 모셨습니다. 그러나 사리탑 전체의 진행과정에서 하자가 생겨 보수를 해야 될 것 같습니다.  사리탑 뒤쪽 옆으로 축대도 쌓아야 되고 연못도 파야 되기 때문에 자연석 220여 차를 들여왔습니다. 피뢰침도 6월 20일 적당한 업자를 만나서 계약을 했습니다.   6월21일 포크레인이 들어와서 축대를 쌓을 기초를 파고 옹벽擁壁 콘크리트를 쳤습니다.  27일부터는 축대를 쌓을려고 합니다만 장마가 진다고 하니 걱정스럽습니다.  상륜을 올림으로 전체 탑의 윤곽이 드러나게 되겠으나 재료가 청동 주물이라 장마가 끝나야 일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의정부 도량 사리탑에 대해서 큰스님께 보고 드립니다.  이런 일이 있을 것을 염려하여 임자壬子년(2516, 1972) 추동秋冬에 천축불적순례시天竺佛跡巡禮時에 선법고扇法鼓에 노스님께서는 나무묘법연화경南無妙法蓮華經 제목을쓰시고  큰스님께서는 영산법화사靈山法華寺의 사명寺名을  쓰셨습니다.  일본산 묘법사를 개창하신 노스님께서 우리 큰스님께 영산법화사의 개창을 인정하신 것입니다. 그 때에 우리 큰 스님께서는 노스님께 법이 한국으로 오니 그 법을 물려주십시오! 하시니 ‘웃기만 하시더라’는 것입니다. ‘탑을 세워야 되는데 돈이라도 내놓으십시오’ 하시니 대답이 없으셨다고 저한테 말씀하셨습니다. 큰스님께서는 언젠가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가 세속世俗에 있었으면 32살에 독립운동을 하다가 여순 감옥에서 죽었을 거야.  내가 출가를 잘 했지.  출가를 해서 명을 이었어.  사명이 있는 사람은 부처님이 20년씩 명을 주셔.  제갈량도 명을 못 늘렸지만 나는 80까지는 살 수 있을 거야.”
1971년, 우이동 법당을 건립할 무렵 그린벨트가 처음 설정되었습니다.  법당 건립 때문에 제가 총무로서 스님을 대신하여 재판을 받아야 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결국 벌금을 내었습니다. 신문로 김순영 보살님께서 당신의 환갑을 그만두시고 그 돈을 보시해 주셔서 법당에 마루를 깔 수 있었습니다. 그로써 법당은 대강 마무리가 된 셈입니다. 어느 날 큰스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성자成者는 거去라.  이룩한 사람은 말없이 가는 거야.  너는 장흥으로 가야 되겠어.  사명이 있는 거야.”
스님을 모시고 장흥으로 들어가니 그 때가 1972년 6월 30일었습니다.  들어가는 날 슬레이트로 임시 지붕을 얹어 하늘만 가린 채 스님을 모시고 잠을 잤습니다. 자고나니 간밤에 보슬비가 왔습니다. 그 해 큰스님께서는 일본을 거쳐 인도로 불적佛跡 순례를 다녀오셨습니다만 스님이 계시지 않는 동안 저를 비롯해 남아 있는 사람들은 여름 장마를 무릅쓰고 그 해 7월 31에는 묘현 스님과 더불어 사부대중이 모여서 상량을 모실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이루어진 토굴이, 장마에도 끄떡없던 그 토굴이 그만 2003년 10월 31일, 한 사람의 뜻하지 않은 실수로 완전히 소실燒失되고 말았습니다.
제가 장흥 토굴에 기거하던 때 이야기입니다.  거기에 머무르는 사람 수가 일정하지 않았는데 제가 한 달에 한 번, 27일이 월례 천도식을 하는 날이기 때문에 우이동 도량에 가야 했습니다.  어쩌다가 우이동 도량 소임자의 못마땅한 점이 눈에 띄어서 큰스님께 시정을 위한 건의말씀을 드리니까
“너는 그런 데 신경 쓰지 말아라.  그래서 성자成者는 말없이 가는 것이다.  과거를 잊어버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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